2024-04-24 07:35 (수)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7)'나의사랑 그리스'㊦ EU가입 후폭풍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7)'나의사랑 그리스'㊦ EU가입 후폭풍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03.30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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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ㆍ금리ㆍ 정부 부채 등 EU가입 조건 충족하려 정부 회계마저 조작
좌파정권 들어서자마자 최저임금 올리고 공무원 충원해 나라재정 고갈
2008년 금융위기때 들통…연금에 기댄 국민은 '위기의 일상화'에 고통

"남유럽 국가들에 대해 유럽연합이 제시한 경제정책에 반발이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그리스인데요, 정책의 부작용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었던 자살이 급증하고 있으며 비안간적인 긴축 정책에 따른 공포와 압박감에 전국이 마비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을까요? 유럽연합은 붕괴되는 것일까요? 이게 세계화의 모습일까요? 경제위기가 선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야심차게 실시한 정책마저 이제는 손쓸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이 새로운 현실이 우리의 결정과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요?"

사진1/소크라테스
사진1/소크라테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 나오는 뉴스 내레이션 한 토막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중 해고당한 고르지오의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나온 것이어서 더욱 가슴을 저민다. 그를 해고한 구조조정 전문가인 주인공 엘리제도 그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는다.

엘리제는 우울증 약에 의존하던 연인 고르지오를 이해하지 못하던 강철 같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도 무너진다. 구조조정 업무를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연인 고르지오처럼 우울증 약을 찾게 된다.

지난 ㊤편과 ㊥편 글에서 얘기했듯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 접하게 되는 그리스는 '일상이 된 위기'로 '일상이 위기에 몰린'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물론 이 같은 나라는 적지 않다.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처럼 남미의 몇몇 나라들도 '위기의 일상화'로 인한 '일상의 위기'를 겪는다. 그래서 그리스의 사례가 드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남미와 유럽은 다르다. 유럽에서는 다소 낙후됐다는 감을 갖게 되기는 해도 그리스는 엄연한 EU 회원국이다. 게다가 서구 문명의 근간이 되는 한 축이기도 하다. 남미와는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사진2/알렉산더대왕
사진2/알렉산더대왕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인지 보는 시각도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몇몇 특정 정치리더 탓을 한다. 유로존의 본질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나라든 현재 처해진 상황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그 나라 역사 전반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태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에 망조가 든 이유를 찾으려면, 가장 먼저, 간단하게나마 그리스의 역사를 봐야 한다.

그리스는, 말했듯, 유럽문명의 원천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현대 학문의 기초를 이룬 이들이 모두 그리스 출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 그친다. 역사에 대한 좀 더 많은 이해가 있다면 그리스를 동로마제국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는 '비잔틴문명'으로도 잘 알려진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자 정통 기독교 국가로 중세 1000년 동안에도 서양 문명의 리더로 군림해 왔다. 그러다 1453년 오스만터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빼앗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보통의 사람이 알고 있는 그리스 역사는 대충 여기까지다. 이후 그리스가 '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오스만터키의 식민지로 힘겹게 명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식민지 그리스로서는 무엇보다 종교문제가 괴로웠다. 정통 기독교 나라로서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 같은 '종교적 빙하기'는 무려 400년이나 지난 뒤였다. 19세기 들어 오스만터키의 힘이 약화됐고 이 틈을 타 그리스도 독립을 꾀할 수 있었다.

사진3/키프러스전쟁
사진3/키프러스전쟁

하지만 오스만터키로부터의 독립이 곧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터키의 통치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유럽 다른 국가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세기 내내 그리스는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왕국과 덴마크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리스가 현대 국가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1908년의 군부쿠데타로 그리스는 마침내 입헌군주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30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리스는 다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히틀러의 독일에 점령당하는 신세가 된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의 점령지가 됐고 좌우 공방이 거의 내란 수준에 이른다. 1949년 입헌군주제가 부활하기는 했으나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는 못했다.

정치적 혼란은 1960~70년대까지 지속됐다. 1967년에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에 대항해 1973년 아테네 시민과 대학생은 봉기를 일으켰다. 1974년 벌어진 그리스와 터키 간 전쟁(시프러스전쟁)은 위기를 느낀 군부의 계략에 불과했다. 하지만 군부는 이 전쟁에서 패했고 분노한 시민에 의해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1975년 공화국이 수립됐고 이후 좌파와 우파의 대립ㆍ갈등 과정을 통해 번갈아 정권을 잡았고 현재에 이르게 된다.

사진4/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사진4/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현대 정치사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은 1981년 총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좌파 진영인 'PASOK(Panhellenic Socialist Movement=전(全)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이 보수당인 신민주당(New Democracy Party)을 누르고 승리했다. 총리는 PASOK의 당수였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Andreas Papandreou). 그는 다음 선거에서 또 한 차례 승리해 1990년까지 그리스를 이끌었는데, 이 10년의 세월은 갓 출범한 민주주의를 안착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를 이끈 이가 바로 파판드레우 총리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파판드레우 총리의 정책은 진보적 성향을 띠었다. 일반 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생각에 최저임금은 물론 평균임금까지 큰 폭으로 인상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추진했으며 한정돼 있던 의료보험 혜택을 모든 계층으로 확대했다. 연금을 안정화시켰으며 기업의 노동자 해고도 상당 부분 제한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라는 나라를 노동자 중심의 복지국가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1-89년, 1993-96년 등 그의 세 차례 총리 재임기간 동안 그리스의 빈부격차 문제는 적잖이 해소됐고 복지국가로의 전환도 꽤 이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파판드레우 총리의 노동자ㆍ복지 중심의 정책은 적잖은 문제를 수반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재정문제였다. 실업률 해소를 위해 공무원을 대거 뽑은 것은 물론 인금 및 연금 인상 등으로 공무원을 중심으로 한 공공부문 근로자 임금은 1980년대 10년 사이 두 배로 뛰었고 은퇴자는 월급여의 92%를 연금으로 가져갔다. 사회당 집권 이후 그리스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20%에서 80%까지 늘어났다. 2004년에는 올림픽까지 치르면서 재정적자는 더 큰 폭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과도한 근로자ㆍ복지 중심의 정책이 이후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됐다는 점이다. 이제 정치권은, '표'를 얻기 위해서는, 좌우를 떠나 누구라도 국민에 대한 '퍼주기 정책'을 펼쳐야 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에는 보수 신민주당으로 정권이 옮겨갔음에도 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스는 이후 누가 더 선심성 공약을 내놓느냐에 따라 정권이 결정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경제는 점점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진5/ 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사진5/ 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여기에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EU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1948년 베네룩스 3국의 관세동맹 체결에서 시작된다. 이후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창설됐고 1967년에는 EEC를 유럽공동체(EC)로 개편했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EU의 골간이 마련됐고 1993년 11월 마침내 EU가 출범한다. 1999년 1월에는 유로화가 전격 도입, 이른바 '유로존(Eurozone)'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참고로 이 '유로존'은 EU와 같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EU가입국이면서 유로화를 쓰지 않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EU가입국이 아니면서도 유로화를 쓰는 나라도 있다.

그리스는 일찌감치 EU에 동참한 선도국이다. 1981년 EC에 가입했으며 2001년에는, 성경에도 나오는 유명한 화폐 '드라크마'를 버리고 유로화를 선택, 유로존 가입국이 됐다. EU 가입국이자 유로존의 가입국. 21세기 그리스가 겪는 위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EU 선도국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해야 했지만 자격이 되지 않았고 억지로 자격을 맞추려 하다 보니 두고두고 경제에 큰 짐이 됐던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로화 출범의 역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제통합은 '하나의 유럽'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다. 또한 경제통합의 원천은 화폐의 통합에 있다. EU운영을 위한 최고 의결기구 유럽이사회는 1986년 유럽단일의정서(Single European Act)에 통화통합 조항을 넣어 일찌감치 유럽경제통화연맹(EMU) 창설을 준비해 왔다. 이후 6년 뒤인 1992년 네덜란드 소도시 마스트리히트에 유럽 12개국 정상이 모여 EMU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토의했다. 논의 결과는 다음 4가지 조건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조건을 유로화가 탄생할 예정인 1999년까지로 정했다.

일명 '마스트리히트 경제수렴기준(Economic Convergence Criteria)'로도 불리는 4가지 자격 조건은 첫째, 물가는 최근 1년 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가장 낮은 3개 회원국 평균 물가상승률 +1.5% 이내여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연간 재정적자 규모가 GDP의 3% 이내인 동시에 정부부채 잔액이 GDP의 60%를 초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금리는 최근 1년 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가장 낮은 3개 회원국 평균 명목 장기 금리 +2.0%p 이내여야 하고, 마지막으로 넷째, 최근 2년 간 자국화 환율을 유럽환율조정장치(ERM, 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의 환율변동허용폭(고정중심환율 –15.0%~+15.0%) 이내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6/ 알렉시스 치프라스
사진6/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두 번째 조건인 '재정' 및 '정부부채' 관련 조항이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현대 그리스 정치는 포퓰리즘에 근거해 있었다. 근로자를 위한 임금인상과 복지에 상당한 재정을 썼던 상태다. 유로존 가입을 위한 조건 중 '연간 재정적자 규모 GDP 대비 3%'와 '정부부채 규모 GDP 대비 60%'를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문(條文)대로라면 그리스는 EU에 가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유로화조차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는 EU 가입국 지위를 유지했고 유로화를 쓰는 유로존에 가입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스는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몇 가지 논리적 추론이 있을 것이다. EU에서 예외적인 사례로 인정했다거나 몇 가지 조건을 달지 않았겠느냐는 등이다. 하지만 답은 의외다. 그것도 매우. 그리스는 정부 회계를 조작했고 실제 재정적자나 정부부채 규모를 교묘하게 숨겼다. 추후 이 과정에서 그리스 정부는 다방면으로 미국 월스트리트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들통났다. 골드만삭스를 포함한 월스트리트의 다수의 은행들이 항만이나 공항 등의 이용권을 받는 대신 장부에 '부채'로 잡히지 않는 자금을 대출해 줬는가 하면 의료보험기금의 부채를 훨씬 먼 미래의 시점에 잡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터지고 나서야 밝혀졌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유럽에 전파된 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이른바 PIGS로 불리던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가 급속하게 커졌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는 곧바로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만큼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스 재정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던 2010년 초 조사결과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GDP 대비 10%가 넘었고 정부부채는 GDP 대비 100%가 넘었던 것이다. 이는 유로존 가입 조건인 GDP 대비 3%와 60%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2009년 말 국제신용평가사가 그리스 신용등급을 강등하자 본격적인 재정위기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됐다.

이후 그리스가 갔던 길은 한 마디로 가시밭길이었다. 2009년 말부터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려던 계획이 무산됐고 2010년 5월 결국 EU와 IMF로부터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이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가 처한 경제위기는 1100억 유로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결국 다음해인 2011년 5월 그리스는 유로존과 IMF에 추가지원을 요구해야 했다. 2012년 3월에는 마침내 1300억 유로 규모의 2차 구제금융이 승인됐으나 그리스의 국가신용 등급은 CCC(상환불가능성 있음)로 한꺼번에 세 단계나 추락하고 만다. 항간에는 유로존의 원천적 한계와 모순, 그리고 EU의 붕괴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그리스 상황이 다시 한 번 급변한 시점은 2015년이었다. 그해 1월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가 '구제금융재협상'을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시리자는 공약했던 대로 유로존과 IMF를 상대로 구제금융 관련 협상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잘 알려진 대로 IMF 구제 금융에는 고금리나 긴축재정, 민영화 등 몇 가지 조건이 따라붙는다. 우리도 1997년 겪었던 일이었지만 이 같은 정책은 기업과 국민의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기업도산과 실업, 연금축소 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는 이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신음하던 그리스를 그리고 있다. 일상화된 위기로 일상이 파괴된 사회. 이 같은 사회에서 어쩌면 사랑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파파칼리아티스 감독이 세 편의 에피소드 모두에서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에 종말을 고한 것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을 것이다. 수백 년 간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굴곡된 역사는 그리스 민족의 질곡이 됐으며, 이는 현대 정치에서 포퓰리즘의 배경이 됐고, 결국 21세기 들어 일상적인 위기로까지 이어졌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외적으로 나라의 재정 상태를 속이는 '사기'까지 드러났다. 이 같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그리스 민족은 지금 '일상의 위기'와 '일상의 파괴'를 겪고 있다.

그리스 역사① : 고대~근대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뿌리다. 기원 전 4~5세기 무렵 이미 소크라테스(사진①)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인류 학문의 뿌리를 일군 선현(先賢)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기원 전 4세기 무렵 알렉산더 대왕(사진②)이 출현, 고대 그리스는 전성기를 맞는다. 서기 146년에는 로마에 편입돼 그리스ㆍ로마 시대를 열었고 5세기 무렵 동로마제국으로 다시 문명의 꽃을 피운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터키에 복속됐고 19세기까지 그리스는 독립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리스 역사② : 20세기

20세기 들어 그리스는 혼란의 연속이다. 1908년 군사쿠데타로 입헌군주국이 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배를 받는다. 전후 미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는 1949년 입헌군주제를 부활하지만 1960~70년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1967년 군사쿠데타와 시민혁명, 터키와의 키프러스 전쟁(사진③) 등을 거친다. 군사쿠데타를 끝내고 마침내 공화국이 수립된 것은 1975년 일이다. 이후 1981년 총선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사진④)의 좌파 정권이 생긴다. 이 정권은 국내 빈부격차 해소, EU에 대한 선도적 가입 등 적잖은 공(功)을 세우지만 국민을 포퓰리즘에 안주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리스 역사③ : 21세기

21세기 들어선 뒤에도 그리스 역사의 혼란은 그치지 않는다. 2001년 만성 재정적자의 장부를 속인 채 유로존에 가입하지만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위기의 여파로 순식간에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한다. 2009년 정권을 잡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아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사진⑤) 총리는 2010년 EU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했던 그리스는 2011년에는 2차 구제 금융을 요청했고 추후 정부의 긴축정책에 고통을 받은 국민은 2015년 급진좌파연합에 표를 몰아줬고 젊은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사진⑥)는 EU탈퇴를 불사한다며 부채 탕감과 추가 융자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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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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