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11:06 (일)
한화 기념관에 남아 있는 김종희창업주의 '불꽃애국'
한화 기념관에 남아 있는 김종희창업주의 '불꽃애국'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8.12.0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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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국산화꿈 이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일조…베어링,유화,에너지 등 기간산업에만 매진
이승만대통령은 일본산 화약을 수입해 쓰는 것을 못 마땅헤 했다. 김종희 한화창업주는 화약국산화에 매달린 이유중 하나다. 다이너마이트를 국산화한 이듬해에 이 대통령은 한국화약 인천공장을 찾았다. 김 창업주(왼쪽)가 이 대통령에게 공장설비를 설명하는 모습.
김종희 한화창업주는 화약 국산화에 매달렸다. 다이너마이트를 국산화한 이듬해에 이 대통령은 한국화약 인천공장을 찾았다. 김 창업주(왼쪽)가 이 대통령에게 공장설비를 설명하는 모습.

경부고속도로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건설될 수 있었을까. 당시 보잘것 없는 장비와 시공능력으로 425km를 2년 5개월 만에 뚫자 세계는 놀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는 길을 내기가 쉽지 않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꼭 집어 찾은 사람이 바로 한국화약 김종희 창업주다. 고속도로 착공 두달 전인 1967년 12월 청와대로 김 창업주를 불렀다.

“김 사장. 경부고속도로를 곧 착공합니다. 화약이 떨어져 공사중단 소리 안 나오게 할 자신이 있소.”

“공장을 풀가동 해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

한화그룹의 CI는 창립 66년 동안 네 번 제작됐다. 시대마다 한화의 사업보국과 도전 정신이 스며있다.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창립 이듬해인 1953년에 선을 보인 한화의 CI는 둥근 원형을 톱니바퀴로 형상화했다.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기간산업을 기반으로 기업을 경영한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가운데 불꽃은 횃불이다. 미래의 길잡이로 세계로 뻗어가자는 뜻을 새겼다. 밑에 쓰여있는 KEC는 한국화약 영문표기(Korea Explosive Company)의 약자이다. 두 번째 CI(1964∼1994년)는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대외 지향적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각오를 표현했다. 다이이몬드는 세계 어디라도 진출한다는 적극적인 기상과 기업융성의 기세를 반영했다. 1994년부터 2006년까지 12년간 사용한 세 번째 CI는 초일류 한화 브랜드의 기치를 내세웠다. 타원은 생명의 근원인 우주를 상징하면서 그룹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지금의 CI(2007년)는 둥근 원 3개가 겹쳐진 모양새이다. ▲경영이념▲그룹비전▲그룹사업 분야가 서로 조화롭게 연결하자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한화그룹 CI변천사) 한화그룹의 CI는 창립 66년 동안 네 번 제작됐다. 시대마다 한화의 사업보국과 도전 정신이 스며있다. (사진설명은 위 좌우, 이어서 아래 좌우 순서) 창립 이듬해인 1953년에 선을 보인 한화의 CI는 둥근 원형을 톱니바퀴로 형상화했다.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기간산업을 기반으로 기업을 경영한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가운데 불꽃은 횃불이다. 미래의 길잡이로 세계로 뻗어가자는 뜻을 새겼다. 밑에 쓰여있는 KEC는 한국화약 영문표기(Korea Explosive Company)의 약자이다. 두 번째 CI(1964∼1994년)는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대외 지향적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각오를 표현했다. 다이이몬드는 세계 어디라도 진출한다는 적극적인 기상과 기업융성의 기세를 반영했다. 1994년부터 2006년까지 12년간 사용한 세 번째 CI는 초일류 한화 브랜드의 기치를 내세웠다. 타원은 생명의 근원인 우주를 상징하면서 그룹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지금의 CI(2007년)는 둥근 원 3개가 겹쳐진 모양새이다. ▲경영이념▲그룹비전▲그룹사업 분야를 서로 조화롭게 연결하자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화약 생산직원들은 3교대로 밤새 공장을 돌려 물량이 달리지 않게 뒷받침했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경영 역정은 국토의 재건과 경제 근대화와의 궤적과 같이한다. 1922년 천안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일본인이 운영하는 화약회사(조선화약공판)에 들어가 화약과 첫 인연을 맺는다. 해방 후 일본 경영인이 떠나면서 김 창업주에게 경영 지배권을 넘겼다. 이미 만든 화약제품을 관리하고 유통하는 일을 책임졌다. 그리고 1952년 조선화약 공판을 사들여 '한국화약'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어 3년 뒤 정부가 매각한 인천 화약공을 사들여 김 창업주의 화약 국산화 꿈이 시동을 걸었다.

 막상 공장을 인수 했지만 생산설비는 다 망가져 있었다. 공장을 재건하려면 공장설계 도면이 당장 필요했다.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아직도 일본 사람이 만드는 화약을 수입해 쓰느냐”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김 창업주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동경대 도서관 창고에서 설계도면을 손에 넣었다. 회사 창립  5년 만에 또 인천공장 인수 2년만에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했다. 산업용과 군수용 화약 제조의 기틀을 다졌다.

우리나라는 원래 화약 분야에 소질이 있었다. 600여년전엔 화약 선진국이었다. 그 자취가 한화기념관(2009년 개관· 인천시 남동구 논현 고잔로168번길 45)에 기록돼 있다. 당시 최무선의 화약 다루는 솜씨는 요즘으로 치면 미사일을 만드는 기술에 가까웠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8월에 일어난 해상 전투가 하나 있다. 바로 진포해전이다. 왜구는 500여 척의 군선(軍船)을 이끌고 전라북도 금강 하류인 진포(鎭浦·현재 군산)를 거쳐 내륙으로 침입했다. 그 때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군선이 100여 척에 불과 했지만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火砲)를 내세워 대승을 거둔다. 군함에서 화포를 장착해 세계 최초로 함포공격을 한 해상전투였다.

그러니까 김종희 창업주는 숨어있던 우리의 화약기술 DNA를 600여년만에 되살린 경영인이었던 셈이다. 한국화약은 화약사업이 자리를 잡자 베어링과 석유화학 그리고 에너지 사업쪽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모두 다 국토 재건과 산업기초에 필요한 분야다. <한화CI변천사 그림참조>

김 창업주는 그때마다 “남들은 돈이 당장 되는 사업을 하라고 권유하지만 사업가로서 조국 건설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한국화약이 아이스크림을 제조(빙그레)와 호텔(프라자)사업에 왜 나섰을까. 사정이 있었다. 70년대 초 뜬금없이 농림부장관이 김 창업주를 찾았다.

화약공장에서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생산 책임자들은 화약류 작업 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1964년 정부가 발급한 면허시험 합격통보장(왼쪽)이다. 오른쪽은 한국화약 인천공장 자리에 있는 성공회 성당 내부모습. 이 곳은 성공회 신자였던 김종희 창업주의 세례명인 '디도'를 따 성디도 성당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임직원들은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한회기념관 구본욱 관장은
화약공장에서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1964년 정부가 발급한 화약류 면허시험 합격통보장(왼쪽)이다. 오른쪽은 한국화약 인천공장 자리에 있는 성공회 성당 내부모습. 이 곳은 성공회 신자였던 김종희 창업주의 세례명인 '디도'를 따 성디도 성당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임직원들의 무사고를 기원했다. 한회기념관 구본욱 관장은 " 지금은 인근 주민들도 찾아와 명상을 하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정부의 권유로 젖소 사육을 권장했는데 우유가 넘쳐나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농가들이 힘들어한다며 운을 뗐다. 그러면서 베트남 주둔 미군에 아이스크림을 납품 하기 위해 공장을 짓던 회사가 미군의 베트남 철군 조치로 부도가 났는데 그 업체를 인수해 공장을 돌려달라고 했다. 4000여 농가를 살리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 소비재에는 한 눈 팔지 않았던 김 창업주는 고심을 거듭했다. 그는 “농촌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다”며 “나라를 위하는 일은 여러가지”라며 경영진에게 회사인수를 지시했다. 호텔건설도 비슷하다. 한국화약은 서울시청 앞 노른자위 부지에 본사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 손님들이 투숙할 변변한 호텔이 없던 시절이라 서울시는 도심재개발의 하나로 한국화약 사옥 자리에 호텔을 건설하라고 종용했다. “내가 밥장사까지 할 수 는 없다”며 차라리 그 땅을 팔아 떠날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서울의 얼굴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듯한 호텔 하나를 지어달라"는 끈질긴 서울시장의 권유를 받고 “관광사업도 사업보국의 길”이라며 생각을 바꿨다.

이왕 짓기로 했으면 선진국 호텔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호텔을 짓겠다고 마음먹고 1976년 지금의 프라자 호텔을 지었다. 지은 지 40년이 넘었다. 하지만 외관이나 호텔디자인은 지금도 세련돼 보인다.

한화기념관은 한국화약 인천공장 자리에 옛 화약제조 설비를 보전하고 있다. 사진은 다이너마이트 생산 과정을 시연하는 라인이다.
한화기념관은 한국화약 인천공장 자리에 옛 화약제조 설비를 보전하고 있다. 사진은 다이너마이트 생산 과정을 시연하는 라인이다.

나라의 경제발전 속도에 맞춰 한국화약의 사세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열려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한국화약은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는다. 바로 이리역 열차 폭발사건이다. 프라자 호텔 개관후 1년만인 1977년 11월11일에 터졌다. 보통 화약을 실은 열차는 무정차로 목적지까지 가는데 무슨 일인지 이틀간 이리역에서 쉬었다. 호송책임자는 날씨가 추워지자 촛불을 옆에 켜놓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게 도화선이 돼 대형사고가 나고 말았다. 수 십명의 인명이 희생됐고 이리역에서 반경 2km내의 건물이 모두 무너졌다. 인근 극장에서 공연하던 이주일 코미디언이 가수 하춘화를 업고 나와 구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 된다.

김 창업주는 일간지에 사과와 보상 의지를 표명하는 사고(社告)를 두 차례 내도록 지시했다. 사재 90억원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 돈은 당시 김 창업주의 전 재산과 다름없었다. 아파트 1190가구를 지어 피해주민들의 안식처를 새로 마련했다. 사과와 피해보상이 지체 없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정부는 보상금 90억원을 3년에 걸쳐 나눠 분담하라며 호응했다.

주민들의 피해 보상과 복구를 진행하면서 한국화약의 자금 숨통도 터준 이례적인 조치였다. 김 창업자는 평생 화약과 동행하면서 숱한 고비를 숙명처럼 넘어야 했다. 한국화약의 요람인 인천공장은 지금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한화기념관(박물관)이 들어섰다. 화약 제조공정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옛 시설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생산부장을 지낸 구본욱 기념관장은 화약 생산시설 하나 하나를 설명하면서 ‘안전조치와 주의사항’을 빠짐 없이 곁들였다.

이 기념관 안에는 작지만 고전적인 성당이 하나 서있다. 천안에서 자랄 때 김 창업주는 성공회 신부의 인도를 받아 신학문의 갈증을 풀었다. 그래서 성공회 신자가 됐다. 그의 세례명 ‘디도’를 따 성 디도성당을 인천공장안에 지었다.  선교의 목적은 없다. 구본욱 한화기념관 관장은 “화약공장에서 일하는 임직원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곳이었고 지금은 인근 주민들도 서슴없이 찾아와 명상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공장내에서는 ‘뛰지도 말고 소리치지도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하루 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화 노조의 창립일은 원래 3월15일이다. 그러나 1977년 불의의 사고로 직원들이 희생당한 3월17일에 노조 창립 기념 행사를 한다.

김 창업주는 이 신축 성당의 완공을 앞두고 1981년 7월 나라와 국토재건의 여정을 뒤로 한 채 말 그대로 불꽃 같은 인생역정을 마무리했다. 정부는 그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추서하며 김 창업주의 사업보국의 일생을 잊지 않았다. <인천= 고윤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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