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0:50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 '기획원의 엘리트'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 '기획원의 엘리트'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4.14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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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중시 박충훈 부총리때 쇠락한 친정 기획원서 '쓰루 사단'의 부활
차관시절 담금질 해둔 이희일ㆍ최창락ㆍ양윤세 등 정책기획 전면에
핵심멤버의 능력과 성격은 물론 때로는 가족사까지 거의속속 파악해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부총리 쓰루가 접수한 기획원은, 그가 차관이었다가 떠났을 때의 그 기획원과 적어도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법과 제도가 안겨준 부처의 권능은 예전과 별다른 게 없었다. 문제는 기획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었다.

'자율성'을 중시하는 박충훈 부총리를 거치면서 기획원은 총괄부처로서 여타 경제부처를 통솔하겠다는 의지도, 또 그 경제부처들이 인정해주는 권위도 크게 쇠잔해 있었다.

그래서 언론은 쓰루가 (왕초에 이어) '기획원의 제2의 전성시대'를 열 것인가 여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기획원은 이제 자신의 기획원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친정' 기획원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최고 최강의 경제부처로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2013년에 발간된  『코리안 미러클』(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개발의 역사를 재조명해 주목을 받았다. 거기에 등장하는 엘리트 관료중 상당수는 쓰루가 담금질해 키운 사람들이었다. 쓰루는 부총리가 되자 이들과 함께 경제개발의 시나리오를 풀어냈다.
2013년에 발간된 『코리안 미러클』(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개발의 역사를 재조명해 주목을 받았다. 거기에 등장하는 엘리트 관료중 상당수는 쓰루가 담금질해 키운 사람들이었다. 쓰루는 부총리가 되자 이들과 함께 경제개발의 시나리오를 풀어냈다.

6월 3일 취임식에서 마주한 기획원 '식구'의 면면은 그의 그런 기대와 자신감을 한껏 부풀게 했다. 그들의 눈빛은 막강 부총리 쓰루에 대한 기대, 다시 한번 기획원을 최고 최강의 부처로 우뚝 서게 하겠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기획 사이드에는 우용해 기획차관보(훗날 쌍용그룹 회장) 밑에 이희일 경제기획국장(훗날 동력자원부 장관)과 김주남 예산국장(훗날 건설부 장관)이, 운영 사이드에는 정문도 운영차관보(훗날 벽산건설 회장) 밑에 최창락 경제협력국장(훗날 한국은행 총재)과 양윤세 투자진흥관(훗날 동력자원부 장관)이 버티고 있었다. 기획원을 이끌고 가는 명실공히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쓰루가 (1961년 기획원 초창기에 예산국장으로 시작해 1966년에 차관 자리를 뜰 때까지) 직접 발탁하거나 담금질을 해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 관료였다.

그는 기획원이라는 조직의 권능과 작동 원리, 그걸 끌고 가는 인물 개개인의 능력과 성격, 그리고 때로는 가족사까지,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개중에는 쓰루 부부가 중매를 서 결혼에 이른 후배 관료들도 있었다.)

비범한 일을 비범한 속도와 방법으로 벌이려는 그에게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보도(寶刀)였다. 2년 반 넘게 녹슬고 있던 그 보도는 이제, 휘두르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쓰루의 두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그 보도를 휘두르고 나서기 전에 당장 꺼야 할 발등의 불이 있었다. 포항종합제철소(포철) 건설사업을 발진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포철 건설사업 하나로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 했다. 하나는 박통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말끔히 떨쳐내고, 자신의 부총리 임명이 바른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정부 안팎의 다른 이들에게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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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일대기의 필자 김정수■ 1950년 김 부총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 부총리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한 고등고시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해에 6.25전쟁이 터져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피난 갔다. 

필자인 경제학자 김정수와 그의 아비자인 김학력 부총리의 일대기를 정리한 '내 이버지의 꿈'(덴스토리刊) 책 표지.
필자인 경제학자 김정수(왼쪽)와 그의 아버지인 김학렬 부총리의 일대기를 정리한 '내 이버지의 꿈'(덴스토리刊) 책 표지.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다가 아버지가 서울서 관료생활을 하게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혜화초등학교,경기중,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줄곧 경제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원,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 산업연구원(KIET),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경제연구원, 미국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 등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다.

1991년부터 두 해 동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관을 지냈고, 1994년부터 18년 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수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경제정책사를 강의하면서 오늘의 우리 경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궈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중앙일보에서 경제 전문 대기자로 활동할 당시 최우석 전 중앙일보 주필(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역임 ·2019년 작고)의 권유로 '아버지, 김학렬 부총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지난 2월 '내 아버지의 꿈'(덴스토리刊)이란 책을 펴냈다. 이코노텔링이 연재하는 '내 아버지 김학렬의 꿈과 시련' 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아래 그 책의 주요 장면을 발췌한 후 저자의 감수와 가필로 편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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