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2:25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5) 비서실장 '엄기자'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5) 비서실장 '엄기자'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3.31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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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기획원 장관과 사이 틀어질 때 마다 '중재역' 자임한 언론인
쓰루의 부인까지 나서 "당신이 도와 달라" 간청해 비서실장직 수락
언론관계 서툴렀던 깁부총리는 말문 막히면 "엄 실장에게 물어봐라"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로 하여금 언론과 ‘편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는, 기자 출신의 언론인을 비서실장으로 영입한 것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당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한국일보의 계열사 서울경제신문 경제부장을 박봉의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으로 ‘모셔’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뒷얘기는 이렇다. 엄일영 부장은 쓰루가 경제기획원 차관이었을 때 한국일보의 기획원 출입기자였다.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엄 기자가 쓰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둘 사이의 가벼운 다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유창순 부총리 때였다. 차관 쓰루가 뭔가를 기자단에게 설명했는데, 엄 기자가 “이거 맞느냐”고 확인차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나 거짓말하는 사람 아니다.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냐?”고 버럭 화를 내더란다. 그래서 엄 기자가 “그래요, 알았어요. 두고 봅시다. 사람이 거짓말 안 하고 살 수 있는지” 하고 넘겼다. 그렇게 기분이 틀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며칠 후 복도에서 둘이 마주쳤다. 그때 쓰루가 “저번에 미안했어” 하고 먼저 사과를 건넸다. 엄 기자의 기분이 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왕초가 사주인 한국일보의 기자였지만, 엄 기자는 장관 왕초와 차관 쓰루 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특히 쓰루의 공개적인 험담을 참지 못한 왕초가 쓰루를 내치려 할 때마다, 이를 극구 말린 당사자가 바로 엄 기자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쓰루로서는 그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었다.

 게다가 엄 기자는 듣기 거북한 충언을 쓰루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쓰루가 20여년 관료 생활동안 가족나들이를 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는데 엄일영 기자(와 그 가족)는서울 근교에서 쓰루가족과 하루를 같인 즐긴 유일한 언론인이었다.

 되돌아보면 그 가족 모임은 아마도 왕초와의 사이를 중재해주는 등 자신을 위해 애쓰는 엄 기자에게 그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무언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쓰루가 부총리로 컴백한다는 소문은 인사 발표 며칠 전부터 나 있었다. 이에 엄 부장이 그에게 사실 확인차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소문일 뿐이라며 딱 잡아뗐다. 두 사람 간의 오랜, 각별한 관계를 생각할 때, 그가 부인하면 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 며칠 후 그가 부총리가 되었다는 뉴스가 터지는 게 아닌가! ‘大한국일보’의 경제부장이란 사람이 부총리 인사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기자들 용어로 ‘물먹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창피한 노릇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닌 쓰루가 자기에게 ‘배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엄 부장이 화가 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66년 10월 26일 재무장관 취임 후 처음 맞은 생일, 쓰루는 부인과 함께 현충원을 찾았다. ‘고성 촌놈이 재무장관까지 하게 된 것은 나라지킴에 목숨을 받친 분들 덕분이다’는 뜻에서다. 1972년 3월 나라경제 지킴에 목숨을 바친 그도 현충원에 묻혔다.
1966년 10월 26일 재무장관 취임 후 처음 맞은 생일, 쓰루는 부인과 함께 현충원을 찾았다. ‘고성 촌놈이 재무장관까지 하게 된 것은 나라지킴에 목숨을 받친 분들 덕분이다’는 뜻에서다. 1972년 3월 나라경제 지킴에 목숨을 바친 그도 현충원에 묻혔다.

엄 부장은 바로 쓰루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쓰루가 엄 부장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 엄 부장이야? 다른 사람들은 축하해준다고 다들 와 있어. 당신은 안 올 거야?”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혜화동 쓰루 집으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져 다들 일어나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쓰루 부인 김 여사가 엄 부장에게 다가와 “가시지 말고 잠시 남아 계시지요. 2층 서재에서 뵈었으면 합니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몇 분 뒤 서재에서 엄 부장과 마주한 쓰루는 불쑥 “나 좀 도와달라. 내 비서실장을 해줘야겠다”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엄 부장이 펄쩍 뛰며 극구 사양하자, 이번에는 김 여사까지 나서서 간곡한 부탁을 계속했다.

쓰루가 어떻게 오늘까지 오게 되었나? 몇 번이고 왕초가 쓰루를 기획원에서 내치려 할 때마다 왕초를 설득하여 끌어안도록 한 게 당신 아니냐? 엄 부장 당신이 그토록 애쓰지 않았다면, 쓰루 부총리는 처음부터 없었을 게 아닌가? …… 비서실장을 맡아달라는 그의 간청을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김 부총리가 처음에는 언론 플레이에 굉장히 서툴렀어요. 성질은 급하고 선후가 분명한 관료 출신이라서 말을 대강 둘러서 할 줄도 모르고. 재무부 장관 시절 기자회견 때 잘못 말려들어서 초단명으로 끝난 경험도 있고. 신문과 기자에 대한 공포증 비슷한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양반이 부총리가 된 후 발언 실수 안 하려고 발표문을 만들어서 줄줄이 읽어 내려갔어요. 그러다가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 나오면 ‘이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미스터 엄이 썼으니까, 미스터 엄한테 질문하시오’ 이런 식으로 비켜 갔어요.”(엄일영 증언)

언론계 대선배에게 기획원 출입기자들이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언론인 출신이 비서실장으로 오면서 기획원의 정책은 언론용으로 잘 포장돼서 신문에 크게 실리곤 했다. 언론과 기자를 무엇으로 춤추게 할 수 있는지, 엄 비서실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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