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의 부인까지 나서 "당신이 도와 달라" 간청해 비서실장직 수락
언론관계 서툴렀던 깁부총리는 말문 막히면 "엄 실장에게 물어봐라"
김학렬로 하여금 언론과 ‘편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는, 기자 출신의 언론인을 비서실장으로 영입한 것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당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한국일보의 계열사 서울경제신문 경제부장을 박봉의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으로 ‘모셔’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뒷얘기는 이렇다. 엄일영 부장은 쓰루가 경제기획원 차관이었을 때 한국일보의 기획원 출입기자였다.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엄 기자가 쓰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둘 사이의 가벼운 다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유창순 부총리 때였다. 차관 쓰루가 뭔가를 기자단에게 설명했는데, 엄 기자가 “이거 맞느냐”고 확인차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나 거짓말하는 사람 아니다.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냐?”고 버럭 화를 내더란다. 그래서 엄 기자가 “그래요, 알았어요. 두고 봅시다. 사람이 거짓말 안 하고 살 수 있는지” 하고 넘겼다. 그렇게 기분이 틀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며칠 후 복도에서 둘이 마주쳤다. 그때 쓰루가 “저번에 미안했어” 하고 먼저 사과를 건넸다. 엄 기자의 기분이 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왕초가 사주인 한국일보의 기자였지만, 엄 기자는 장관 왕초와 차관 쓰루 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특히 쓰루의 공개적인 험담을 참지 못한 왕초가 쓰루를 내치려 할 때마다, 이를 극구 말린 당사자가 바로 엄 기자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쓰루로서는 그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었다.
게다가 엄 기자는 듣기 거북한 충언을 쓰루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쓰루가 20여년 관료 생활동안 가족나들이를 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는데 엄일영 기자(와 그 가족)는서울 근교에서 쓰루가족과 하루를 같인 즐긴 유일한 언론인이었다.
되돌아보면 그 가족 모임은 아마도 왕초와의 사이를 중재해주는 등 자신을 위해 애쓰는 엄 기자에게 그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무언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쓰루가 부총리로 컴백한다는 소문은 인사 발표 며칠 전부터 나 있었다. 이에 엄 부장이 그에게 사실 확인차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소문일 뿐이라며 딱 잡아뗐다. 두 사람 간의 오랜, 각별한 관계를 생각할 때, 그가 부인하면 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 며칠 후 그가 부총리가 되었다는 뉴스가 터지는 게 아닌가! ‘大한국일보’의 경제부장이란 사람이 부총리 인사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기자들 용어로 ‘물먹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창피한 노릇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닌 쓰루가 자기에게 ‘배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엄 부장이 화가 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엄 부장은 바로 쓰루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쓰루가 엄 부장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 엄 부장이야? 다른 사람들은 축하해준다고 다들 와 있어. 당신은 안 올 거야?”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혜화동 쓰루 집으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져 다들 일어나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쓰루 부인 김 여사가 엄 부장에게 다가와 “가시지 말고 잠시 남아 계시지요. 2층 서재에서 뵈었으면 합니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몇 분 뒤 서재에서 엄 부장과 마주한 쓰루는 불쑥 “나 좀 도와달라. 내 비서실장을 해줘야겠다”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엄 부장이 펄쩍 뛰며 극구 사양하자, 이번에는 김 여사까지 나서서 간곡한 부탁을 계속했다.
쓰루가 어떻게 오늘까지 오게 되었나? 몇 번이고 왕초가 쓰루를 기획원에서 내치려 할 때마다 왕초를 설득하여 끌어안도록 한 게 당신 아니냐? 엄 부장 당신이 그토록 애쓰지 않았다면, 쓰루 부총리는 처음부터 없었을 게 아닌가? …… 비서실장을 맡아달라는 그의 간청을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김 부총리가 처음에는 언론 플레이에 굉장히 서툴렀어요. 성질은 급하고 선후가 분명한 관료 출신이라서 말을 대강 둘러서 할 줄도 모르고. 재무부 장관 시절 기자회견 때 잘못 말려들어서 초단명으로 끝난 경험도 있고. 신문과 기자에 대한 공포증 비슷한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양반이 부총리가 된 후 발언 실수 안 하려고 발표문을 만들어서 줄줄이 읽어 내려갔어요. 그러다가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 나오면 ‘이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미스터 엄이 썼으니까, 미스터 엄한테 질문하시오’ 이런 식으로 비켜 갔어요.”(엄일영 증언)
언론계 대선배에게 기획원 출입기자들이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언론인 출신이 비서실장으로 오면서 기획원의 정책은 언론용으로 잘 포장돼서 신문에 크게 실리곤 했다. 언론과 기자를 무엇으로 춤추게 할 수 있는지, 엄 비서실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