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오페라단 초대 이사장- 후원 회장 잇따라 맡아 지원
세아그룹 도약발판 마련…2013년 해외서 급환으로 타계
월 10일은 예술을 사랑했던 철강기업인 고(故)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의 7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는 2013년 3월 10일 해외출장길에서 66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나는 철강기업인으로 유럽을 자주 방문하곤 했다. 현지 업계 관계자들이 오페라나 성악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평소 그들이 가진 문화예술에 대한 높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보고 나도 우리나라 문화예술 후원을 결심했다.”

이 회장이 2000년 초 국립오페라단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밝힌 내용이다. 그는 2000년부터 7년간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으로 오페라 대중화와 예술성 제고에 시간과 비용을 할애했다. 2008년 초 2대 이사장직을 당시 이구택 포스코 회장에게 넘겨주고 국립오페라단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6년 6월부터는 예술발전을 위한 경제계 후원모임인 한국메세나협회 부회장으로도 봉사했다.
그는 자신의 문화예술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철강업 경영은 딱딱한 하드웨어를 다루는 것에 비유할 수가 있다. 그런 만큼 우리 사회의 소프트웨어 분야인 문화예술계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만 한다. 세아그룹은 매출의 1% 정도를 문화후원 및 사회공헌 비용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그가 타계했을 때 재계와 세인들이 “예술을 사랑했던 철강기업인”이라는 헌사를 그에게 바치며 못내 아쉬워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칠레 경제협회 및 오페라 관계자 회의 참석차 가던 중 경유지 타히티섬에 들렀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 직전인 2012년 서울 마포구 합정동 로터리에 신사옥(세아 타워)을 마련하고 향후 50년을 새롭게 준비 하겠다며 열정을 보이던 때였다. 2013년 1월엔 세아그룹 전 계열사의 서울 본사 및 사무소들을 세아 타워에 집결시키고 그룹 통합체제 구축에도 의욕을 보였던 터라 이를 아는 지인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당시 재계는 “오너 2세로 40년간 경영 일선을 지키며 세아그룹을 중흥시킨 철강 전문 기업인이자 재계 화합과 발전에도 나름대로 공이 많았던 겸손하고 따뜻했던 기업인”이었다고 그를 평가했다.

그가 경영의 바쁜 시간을 쪼개 맡았던 재계 직분은 철강협회 부회장(1982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2000년),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2000년), 무역협회 부회장(2007년) 등이었다. 1990년대 초반 세아제강 사장이었던 그는 포항 공장을 자주 찾았다.
당시 철강업계를 취재했던 필자가 “포항 출장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힘이야 저보다 공장 직원들이 더 들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면서 “일을 마치면 인근 구룡포항 해변에 마련해둔 아파트에서 탁 트인 동해를 바라보며 쉬는 재미도 있다”는 말도 했다. 그는 겸손하고 성실하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그에게서 오너 2세 티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 눈웃음으로 상대방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던 기억도 난다.
그는 우리 사회 통념에 비쳐볼 때 소위 ‘엘리트 기업인’에 속한다. 1947년생인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도 받았다.
세아그룹 창업자 고 이종덕 회장은 1960년 부산 감만동에 부산철관공업(주)을 세운다. 해방 직후부터 여러 가지 사업을 해왔던 그는 철강판매업으로 돈을 모으자 철강제품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주력 제품은 강관(철로 만든 파이프)이었다.

부산철관공업은 1975년 사명을 부산파이프로, 1996년엔 세아제강으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일찍이 기술과 사람을 중시한 사풍 덕분에 세아그룹은 2019년 공정위 발표 기준 재계 순위 39위, 계열사 24개, 자산 총계 9조4000억원에 이르는 철강(강관·특수강) 전문그룹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은 회사 중흥을 위해 분투했다. 그는 1974년(28세) 부산파이프 이사로 경영 일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부사장을 거쳐 포항 제2공장이 완공됐던 1980년 사장이 돼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1995년 1월 회장에 올라 2013년 3월 작고할 때까지 18년 간 오너로써 최고경영자 역할을 맡아 했다. 2003년엔 특수강 사업 진출을 위해 기아특수강(현 세아베스틸)을 인수하기도 했다.
특히 회장 재임 중 밀어닥친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에 진력했다. 그는 위기 극복의 돌파구를 해외에서 찾으려 했다. 내수시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수출을 늘려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란, 이라크 등 중동으로 눈을 돌려 2011년 4월 UAE에 7000만 달러를 들여 강관공장을 준공하기도 했다.
세아그룹은 1960년 창업 이래 인력 구조조정을 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모든 가치 창출의 원천은 사람이라는 소위 ‘인간 존중’ 경영을 해온 것이다. 이런 자산은 부침이 심한 철강업을 3대에 걸쳐 유지, 발전시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이 회장은 “2009년 글로벌 위기 당시 수출 주문이 취소돼 공장이 2~3개월가량 멈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인력 구조조정 대신 직원들 교육을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운형 회장은 창업자인 부친 이종덕 회장의 2남4녀 중 장남이다. 그는 회장 재직 시 대외적인 일을 주로 맡아 했고, 내부 일은 동생 이순형(71) 부회장(현재 회장)에게 맡겨 역할 분담을 했다. 그가 작고하자 동생 이순형씨가 회장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른다.
미망인 박의숙(74) 세아홀딩스 부회장, 장남 이태성(42) 세아홀딩스 대표, 조카(이순형 회장 장남) 이주성(42) 세아제강 부사장 등도 이운형 회장 생전에 이미 그룹 경영에 일정 정도씩 참여하고 있었다. 그가 타계한 후 세아의 가족경영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재계는 세아그룹이 2018년부터 형제·사촌 간 분리경영 체제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운형 회장의 장남 이태성 대표는 세아홀딩스 계열(세아베스틸·세아특수강 등)을 맡고, 이순형 회장 부자는 세아제강 라인을 맡는 체제다. 세아는 이 회장 타계 7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별 잡음 없이 플러스 실적을 꾸준하게 낳는 양호한 경영을 해 나가고 있다. 이 또한 이운형 회장의 유덕(遺德) 덕분으로 여겨진다.
한국의 대표적 강관 기업이었던 부산파이프 그룹은 이운형 회장 취임(1995년 1월) 이듬해인 1996년 1월 그룹 명칭을 ‘세아’로 변경했다. 주력기업 부산파이프 사명도 세아제강으로 바꾸는 등 철강 사업의 외연 확대에 나섰다. “세계 속의 아시아 일류 기업”을 지향한다는 뜻을 담았다. 10년 후인 2005년 1월엔 다시 ‘세아’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세상을 아름답게”로 재설정했다. 모두 이 회장 재직 시 이뤄진 일들이다. 예술을 사랑했던 그는 세아그룹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기업으로 커가는 길에 든든한 주춧돌을 놓고 떠난 철강기업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