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직후 '이런 간부는 사표를 쓰라' 책 돌려 기강 잡아
전임 부총리때 따로 따로 놀았던 경제부처들도 좌불안석
"신라- 세종시대 이을 역사 황금기에 도전"파격적인 會見
1969년 6월, 김학렬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된다. 만 46세의 부총리는 당시 언론이 예상한대로 일을 크게 벌렸고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팀도 김학렬 부총리의 구상대로 꾸려졌다.
그해 10월, 진짜 '쓰루 경제팀'이 탄생한다. '쓰루의, 쓰루에 의한, 쓰루를 위한 경제팀'이었다.
그는 오뚝이 인생을 살았다. 좌절 후에는 늘 전보다 더 높이 튀어 올랐다. 관료 쓰루에게 세 번의 강등이 있었는데, 모두 얼마 가지 않아 더 높이 승진하곤 했다. 첫 강등은 1961년 군사정권 초기에 사세국장에서 예산국장으로 자리를 바꾼 경우다.
부처를 바꾼 지 두 달 만에 그는 기획원의 1급 자리인 초대 기획조정관이 되어 기획원 안에서 초고속 승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두 번째 강등은 기획조정관에서 무보직으로 사실상 기획원에서 쫓겨났을 때였다. 깐깐한 기획예산 업무로 군부에 밉보인 탓이었다.
그 마찰로 김유택 경제기획원 원장까지 물러났으나, 두 달 뒤 송요찬 내각수반이 물러나고 김 원장이 돌아오면서 쓰루는 운영차관보라는 실세 보직으로 승진 컴백했다. 세 번째는 왕초 부총리와의 불화로 재무부 장관 자리를 100일도 못 채우고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물러앉았을 때였다. 거기서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는 2년 반 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금의환향한다.
1969년 5월 어느 날, 그가 상기된 얼굴로 퇴근해 부인에게 말했다. "박 대통령이 (나더러) 부총리 하라는데."
부인이 물었다. "그래 어이 대답했노?" "집사람하고 의논 좀 해보겠습니다고 켔지."
"니 빙신이구나. 후딱 네, 하겠습니다고 케야제." 다음 날 그가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박통이 "부인 허가 받으신 모양이지" 하며 웃었다고 한다.
1969년 6월 3일, 쓰루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통관료 1호가 임명직 최고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박통과 쓰루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놀랐다. 물론 걸핏하면 청와대에 불려가 그로부터 정책 지시를 받아온 기획원 관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혁명으로 집권한 젊은 대통령 아래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시절이 하 수상하여 별일이 다 있다 하더라도, 만 46세의 경제수석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된다는 것은 이례 중의 이례인 건 분명했다. 부총리 쓰루의 등장은 그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이들, 특히 기획원 출입기자들의 예상마저 뛰어넘는 것이었다. 언론은 놀라움과 더불어 향후 경제행정이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기대를 표했다
."재무장관 3개월 만에 물러나 2년여 동안 청와대에서 칼을 갈던 김 부총리의 등장은 심상치 않은 폭풍을 예고했다. …… 그의 특별한 성격을 잘 아는 기획원 사람들은 '이제 우리는 죽었다'고 미리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취임 후 며칠 되지 않아 그는 『이런 간부는 사표를 써라』라는 제목의 일본 책을 여러 권 사서 간부 직원들에게 돌렸다. 각자가 몸담고 있는 조직과 자신의 발전을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의 컴백에 대한 기획원 관료들의 우려는 더욱 깊어졌다.
죽었다고 복창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군림하기를 꺼려 했던 박충훈 부총리 아래 자유를 구가하며 따로따로 놀았던 경제부처들도 쓰루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초긴장 모드에 빠져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부총리로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다. 개각이 발표된 6월 3일,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청와대에서 기획원으로 갔다. (길거리에 승용차가 성기었던 때라, 청와대에서 기획원은 부총리 관용차로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익숙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낯익은 4층 기자실로 직행했다.
기자들에게 취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그는 '우리 역사상의 황금기'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신라시대, 두 번째는 세종대왕 때, 세 번째는 대원군 시대가 될 뻔하다가 실패했다면서, 자신은 지금 네 번째 황금기에 도전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동방의 등불이 다시 빛나리라……'는 '타고르'의 시를 영어로 낭송했다.
어리벙벙해진 어느 기자가 "전임 박 장관은 '조용한 전진'을 내걸었는데, 김 장관께서는 '시끄러운 전진'을 계획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묻자, 그는 두 손을 크게 저으며 기자회견 자리를 떴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한국의 황금기를 이룩하려는 주도 세력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그와 그의 경제팀이 조용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전임 박 부총리가 '무난 장관'이었다면, 신임 부총리 쓰루는 '돌풍 장관'이었다.
쓰루의 부총리 취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왕초와 쓰루' 간의 관계를 화해 모드로 바꾸는 전기를 마련했다. 물론 그 화해의 악수는 통이 큰 왕초가 먼저 내밀었다. 당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차 공산권이었던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 있었던 왕초가 파리 대사관 경유로 축전을 보낸 것이다. '김학렬 부총리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쓰루도 역시 파리 대사관을 통해 '축전 감사. 장 위원의 IOC 직무 수행에 성공과 영광이 있길 빈다'는 답장을 보내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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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일대기의 필자 김정수■ 1950년 김 부총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 부총리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한 고등고시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해에 6.25전쟁이 터져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피난 갔다.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다가 아버지가 서울서 관료생활을 하게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혜화초등학교,경기중,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줄곧 경제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원,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 산업연구원(KIET),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경제연구원, 미국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 등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다.
1991년부터 두 해 동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관을 지냈고, 1994년부터 18년 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수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경제정책사를 강의하면서 오늘의 우리 경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궈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중앙일보에서 경제 전문 대기자로 활동할 당시 최우석 전 중앙일보 주필(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역임 ·2019년 작고)의 권유로 '아버지, 김학렬 부총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지난 2월 '내 아버지의 꿈'(덴스토리刊)이란 책을 펴냈다. 이코노텔링이 연재하는 '내 아버지 김학렬의 꿈과 시련' 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아래 그 책의 주요 장면을 발췌한 후 저자의 감수와 가필로 편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