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2:35 (화)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 '한국경제사'시간여행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 '한국경제사'시간여행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20.03.13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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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國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린 '불꽃 관료 20년'의 발자취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 비전 공유' … 절대 신임 속 先公後私
포스코ㆍ통일벼ㆍ소양강 댐 건설 등 대역사마다 그의 손길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대한민국이 건국 초기부터 갈망했던 산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쇳물을 만드는 제철소 건설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도 그림을 그렸지만 선진국들로부터 비야냥만 들어야 했다. 이 꿈은 1969년 부총리에 오른 김학렬의 손에서 영글기 시작했다. 부총리 취임하자마자 포항제철을 세운다는 대담한 구상을 펼쳤다. 당시 정부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들어온 5억달러 규모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밑천삼아 경제개발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그려 나갈 때였다. 당장 살림이 쪼들린 농어촌 지원 사업비가 필요해 보였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철소 건립을 추진하자고 건의한 인물이 바로 김 부총리다.

농촌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도 농촌에 애정을 갖고 있던 박 대통령은 김 부총리의 건의를 여러 차례 뿌리쳤다. 하도 김 부총리가 매달리니까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 번 해보겠다는 김 부총리의 뜨거운 의지를 꺾지 못했다.

대일청구권 자금의 25%(1억2천만달러)가량을 제철소 사업에 투입하는 대역사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를 들이는 투자 규모였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제철소를 짓겠다고 하자 난색을 표시했다. 김 부총리는 이 때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의 재계를 움직여 기술과 돈이 들어 오게 했다.

그러나 한일간 경제협력 의제로 올라간 제철소 건립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펼쳐졌다. 이와 관련한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끈질기게 매달리자 '성의를 봐서' 국장급을 단장으로 한 현장 조사단을 우리나라에 보낸다. 시늉만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때 한국의 부총리가 직접 니서 그 국장급 단장에게 포항제철의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한 브리핑을 한다. 이를 두고 정부 안팎에서 "부총리가 일개 국장에게 그게 뭐냐. 격이 안 맞다. 너무 자세를 낮추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무성했다.

1966년 도쿄에서 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창립총회 때 이사국의 재무장관 자격으로 '한복'을 입고 간 그의 기개는 다 어디 갔냐며 고개를 갸웃뚱한 것이다. 그러자 김학렬 부총리는 "폼이 밥 먹여 주냐"며 직접 브리핑 했다.이에 감복한 일본 조사단은 포철 건설의 타당성에 후한 점수를 매겼다는 후문이다..

귀국을 앞둔 일본 조사단의 환송연 자리에서 흥이 오른 어느 일본 관리는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한 즉흥시 하나를 지었다. 그는 김 부총리의 별명을 붙여 '쓰루의 제철 등불이 보인다'라는 구절을 넣었다. 쓰루는 김학렬의 가운데 한자인 '학'(鶴)의 일본식 발음이다. 즉 '포철=쓰루 제철'로 본 것이다.

이코노텡링이 독점 연재 할 '김학렬 일대기'에는 이처럼 쓰루의 불꽃 같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일하는 스타일을 놓고  한국경제 성장의 한 축을 이끌던 장기영 부총리의 행보와 종종 비견된다.

장 부총리가 앞뒤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경제정책'을 밀어 붙였다면 김 부총리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다. 보다 실용적인 접근 방식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경제사의 기념비적인 사업에는 그의 발자취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까 일을 되는 쪽으로 추진하는 힘이 김학렬 부총리에게는 더 있었던 것 같다.

조화롭게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김 부총리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정부아래서도 할 말을 하는 '대쪽 관료'였다. 부당한 지시는 거슬렀다. 재무장관 시절 '왕초' 장기영 부총리와 드러내놓고 갈등을 표출했다. 왕초의 의중을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은행금리는 내가 정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또 재무부 예산과장때는 송인상 재무장관의 청탁성 민원에 귀를 닫았다.

초대 김유택 경제기획원 장관밑에서 차관으로 일 할 때는 일부 부처 장관의 예산 청탁을 '고압적으로 '들어주지 않아 원성을 살 정도였다. 거절하면서 내 뱉은 발언이 종종 도마에 올랐다.

(쓰루) "장관께는 기분이 좋지 않아 예산을 줄수 없다."

(어떤 장관) "예산을 당신 기분대로 하나."

(쓰루) "기분대로 판단해도 장관께서 수십번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하다.)

그를 겨냥한 비난의 화살이 모아졌지만 쓰루의 기개는 거침이 없었다.

김 부총리는 일본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뒤 학병으로 징집당했다. 이 때 조선인  학병들에게 '아리랑'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 일본 장교와 한판 붙었다. 이 장면은 당시 쓰루의 학병 동기인 김수환 전 추기경과 구태회 전 국회부의장 (LG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이 지켜봤다.

대한민국을 흔히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로 부른다. 하루 끼니를 걱정하던 국가가 불과 한 세대 만에 세계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로 성장했으니 기적이라 여길만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한 나라 중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 대장정을 이끈 리더 중 한 사람이  김학렬 부총리이다. 그래서 그의 일대기를 밟다보면 '한국경제 역사'가 그림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김 부총리는 6.25 전쟁 직전에 나라의 인재를 처음으로 뽑는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래서 관료생활 내내 '한국 정통관료 1호'란 자부심이 넘쳤다. 그런 김 부총리 밑에서 일하기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관료사회에선  '쓰루식 담금질'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숫자 하나 틀렸다는 이유로 김 부총리에게 호되게 질책당해 혼비 백산한 관료가 한 둘이 아니었다.

포핳제철(현 포스코)의 꿈은 김학렬 부총리(사진 오른쪽)에 의해 영글기 시작했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포철 초대사장이 건설의 첫 삽을 뜨는 기공식을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공장의  준공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공장 준공 몇달을 앞두고 72년 김 부총리는 49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대신 김 부총리의 부인인 김옥남 여사가 대신 준공식에 참여했다. 사진=포철 50년사.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꿈은 김학렬 부총리(사진 오른쪽)에 의해 영글기 시작했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포철 초대사장이 건설의 첫 삽을 뜨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공장의 준공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준공 몇달을 앞둔 72년 김 부총리는 49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그 대신 김 부총리의 부인인 김옥남 여사가 준공식에 참여했다. 사진=포철 50년사.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혼이 났던 관료들이 줄줄이 승진하자 당시 관가에는 "쓰루의 욕을 먹지 않는 사람은 승진이 안 된다"는 말까지 돌았다. 어려운 나라살림을 이끄는 리더로서 김 부총리는 관료가 깨어있지 않고 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치밀한 수완은 당시 관료들에겐 넘기 힘든 허들이었지만, 누구나 그 허들을 넘어야 정책실행의 첫 단추가 꿰어졌다.

물론 경제발전의 주역은 우리의 앞 세대들이다. 그들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겨우 풀칠힐 수 있는 임금을 받으면서 숨 쉬기도 어려운 비좁은 공간에서 미싱을 돌렸고, 열사의 중동에서 모래 바람을 견뎌냈다. '5천년 가난'을 벗어나자는 의지와 희망으로 무장했다.

이런 국민의 헌신을 한 마음 한 뜻으로 끌어 모은 리더십이 당시에  있었다. 그럼 김 부총리의 리더십의 원천은 무엇일까. 청렴과 기개는 기본이었다. 관료 생활중 여러 차례 물을 먹기도했지만 바른 공직생활 덕에 되살아났고 더욱 승승장구했다. 뭐니 뭐니 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이 그를 거침없이 뛰게 했다. '정치'에는 한 눈 팔지 않겠다는 김학렬의 의지를 꿰뚫어 본 박 대통령이 믿고 거의 모든 일을 다 맡겼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무장관을 100일도 못 채우고 물러난 다음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갔는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대통령의 정책판단에 정확한 자료로 뒷받힘했고 대통령 눈에 들어 초대 '경제수석'자리에 올랐다. 당시 수석은 차관급이었는데 경제수석은 장관 예우를 받았다. 대통령과 경제정책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한국의 경제 정책은 대통령 박정희와 걍제수석 김학렬의 독대에서 거의 마무리되다시피 했다.

김학렬 부총리 시대는 '쓰루의, 쓰루에 의한, 쓰루를 위한' 경제팀이 짜여졌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정치권을 움직이는 처세에 눈을 떴다. 정치권과 척을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이다. 지역 주민을 만나면 "이 지역에 내려온 예산은 지역의 000국회의원이 부탁이 있었기에 배정된 것입니다. 그 분에게 감사하세요"라고 슬쩍 자신을 낮췄는데 그만한 묘약도 없었다. 내로라하는 야당 국회의원들마저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중재, 정해영 의원 등과는 '아삼륙'으로 지냈다.

대한민국의 굵직한 '경제 대역사'는 그렇게 하나씩 이뤄져 나갔다. 경부고속도로는 물론 포항제절과 소양강댐 건설,  심지어 4대강 유역 개발의 아이디어까지 쓰루의 머리에서 나왔다. 식량 자금자족의 물꼬를 튼 '통일벼'의 탄생 이면에도 김학렬의 손때가 묻어있다.

스스로 머리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에게 늘 배고픈 것이 하나 있었다. 2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추진하면서 외국 경제 전문가들의 머리를 빌려야 했던 그로선 정부 정책을 뒷받침할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대한민국 인재로 꾸려진 번듯한 '경제연구소' 하나를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설립한 게 한국개발연구원(KDI)이다. 박 대통령도 사재로 출연금을 낼 정도로 적극적이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포항제철 준공식에 그가 없었듯이 KDI 개원식에도 그는 없었다. '공직의 엄중함'을 빈틈없이 내조한 김옥남 여사가 대신 참석했다. 김학렬은 지명(知命)을 미처 채우지 못한 49세에 타계했다.이코노텔링은 조국에 성장의 씨앗을 뿌린 그의 불꽃같은 관료생활의 여정을 오늘부터 다시 되짚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2회부터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가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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