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2 15:17 (토)
뉴욕을 만든 사람들㉜백남준㊦TV에 예술魂
뉴욕을 만든 사람들㉜백남준㊦TV에 예술魂
  •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20.01.28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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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공학과 물리학 원리 터득해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자유자재 활용
축재에 무관심해 돈이 생기면 모두 작품 만드는데 투입하고 사치와도 거리
예술 활동 동료였던 日여인 구보타 시게코와 뉴욕 시청 앞에서 '거리 결혼'
'한국문화를 수출하는 상인'으로 자임…공산국가의 초청 쇄도했지만 거절
2006년 1월 타계…장례는 뉴욕 맨해튼 최고 요지의 캠벨 장례식장서 치러

백남준은 텔레비젼 탄생 원리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전자공학과 물리학에 심취했다. 한 발 나아가 텔레비젼을 예술의 도구로 삼았다. 당시 그 누구도 텔레비젼을 예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TV 원리에 천착했다. 소위 예술인들은 물리 등, 과학적인 면에서 취약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과학을 두루 이해했다. 또 한 분야에 깊이 빠지는 그의 탐구정신은 기어코 텔레비전에 예술의 옷을 입혔다.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백남준은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정체성이 이 한마디에 담겨있다. 그는 공산권 국가에서도 많은 초청 제안을 받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대한민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텔레비젼을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비디오 영상을 편집하고  때론 부수고 하는'일련의 과정'을 보노라면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과학적인 상상력이 얼마든지 예술이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1963년 독일에서 열린 첫 개인전인 ‘음악의 전시-전자TV’에서 텔레비전 13대와 피아노 3대, 소음기 등을 배치하고, 이 가운데 피아노 1대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한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란 이름을 알렸다.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음악ㆍ 퍼포먼스ㆍ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예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때론 여자 첼리스트가 상의를 나체로 드러내고 첼로 연주를 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한다.

백남준은 1979년부터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친다. 그나마 그 시절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했다고 나중에 고백한다. 교수로서 월급이 적지않게 나오니 생활력이 없는 예술가에게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고,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해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는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됐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이겨내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영상전, 미술전 등을 열었다 .그는 1996년 독일 『포쿠스 Focus』지의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고, 1997년 에는 독일 경제 월간지 『캐피탈 Capital』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오른다.

상복도 터진다. 같은 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이 비독일 국민에게 주는 '괴테메달'도 받았다. 또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98 교토상'을 수상한다. 이어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윤택하지 못했다. 풍족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은 백남준이 20대 중반까지 였다. 그 이후는 생활이 어려웠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태창방직은 사라진다. 친일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이상 존립하기가 어려웠다. 1956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백남준의 형이 그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하다 결국 얼마 못 가 박정희 정권에 재산을 헌납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접었다.

그는 또한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일본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오른쪽)와의 만남도 예술활동  과정에서 동료로서 만났다. 일을 같이 하다보니 가까워졌고 부부가 됐다.  결혼식도 치를 경제여력이 없어 적인 여력도 없었다.
백남준은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일본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오른쪽)와의 만남도 예술활동 과정에서 동료로서 만났다. 일을 같이 하다보니 가까워졌고 부부가 됐다. 결혼식도 치를 경제여력이 없었다.

집안의 쇠락과 경제관념이 없는 예술가로서 해외생활을 하려니 늘 쪼들렸다. 그는 또한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일본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와의 만남도 예술활동  과정에서 동료로서 만났다. 일을 같이 하다보니 가까워졌고 부부가 됐다.  결혼식도 치를 경제여력이 없었다.  뉴욕시청 앞에서 친구 몇 명이 모여서 결혼세레모니를 했다. 요즘도 가끔씩 이런 풍경은 뉴욕 곳 곳에서 볼 수 있다. 뉴욕엔 '시티 웨딩'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결혼식 없이 그저 시청에 신고만 하고 바로 동거로 들어간다. 요즘 이러한 젊은 부부들이 무척 많다. 결혼식은 이 비쁜세상에  거추장스럽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다. 그게 옳을 수도 있다. 여유도 없는데 무의미한 형식적인 세레모니가 뭐 필요하겠는가. 상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풍습이다.

반신불구의 몸이지만 에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2000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서울의 로댕갤러리,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의 하나로  ‘백남준의 세계전’을 연다. 플럭서스에서 비디오 아트, 이후 레이저 아트까지 새로운 예술을 찾아 끊없이 비디오 아트의 지평을 넓혔다. 그러던 2006년 1월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74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과로로 1996년 쓰러진 이후 '고통의 10년'을 살다갔다.

그는 죽기 전까지 애지중지한 신문이 있었다. 뉴욕타임스다. 그가 첫 예술계에 등장할 무렵인 1960년대 중반 뉴욕타임스가 그의 '전자예술'을 크게 다뤄줬다.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신문이 너무 좋아 그는 평생 그 신문을 항상 곁에 두고 살았다 한다. 순수하기도 한 그 어린 마음을 날카롭고 쌀쌀한 뉴욕타임스가 처음으로 인정해 주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는 지난 80년대 중반 3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남긴 그의 인터뷰에서 애국심을 드러낸다.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정체성이 이 한마디에 담겨있다. 그리고 그는 공산권 국가에서도 많은 초청 제안을 받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의 순수한 국가관과 철학은 그 만큼 깊었다.

어느 신문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알렸다. "인류 최초의 화가나 조각가는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비디오 아트 창시자는 누구인지 확실하다. 바로 백남준이다."

그의 장례는 뉴욕 맨해튼 최고 요지인 어퍼 이스트 매디슨가 캠벨 장례식장에서 거행됐다. 그는 생전에 축재를 경멸했고, 호화나 사치를 싫어했다. 오로지 예술을 위해 돈을 썼다. 그의 모든 삶은 예술을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마지막 행사로서 예술 이 외의 곳에 돈을 썼다. 그렇게 고급스런 장례식장에서.가는길은 꽃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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