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7:50 (화)
뉴욕을 만든 사람들㉛백남준㊤비디오아트 선구자
뉴욕을 만든 사람들㉛백남준㊤비디오아트 선구자
  •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20.01.20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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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5번가에 있는 구게하임 뮤지엄에는 그의 조각 같은 작품이 반짝 반짝
풍족한 집안서 태어나 음악에 눈을 떴고 이후 미학과 과학 등을 천착한 천재
1958년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와의 만남이 백남준의 예술세계의 지평 넓혀

뉴욕을 빛낸 사람 중에 한국인을 선정한다면 단연,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꼽을수 있다. 그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그렇다. 1960년대 중반 뉴욕에 정착한 후 약 50년간 뉴욕에서 활동했고  뉴욕에 그가 남긴 발자국과 자취는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다.

지동차가 귀한 시절에 백남준의 집은 자동차 7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값비싼 캐딜락 자동차는 그 당시 국내 2대 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자동차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동차가 귀한 시절에 백남준의 집은 자동차 7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값비싼 캐딜락 자동차는 그 당시 국내 2대 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뉴욕 5번가 구겐하임 뮤지엄 등에서 그의 작품들이 지금도 반짝이며 돌아가고 있다. 그가 아내와 살았던 맨해튼 소호 지역에  부부가 남겨놓은 문화 향기가 여전하다. 백남준과 뉴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비디오아트?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다. 그가 세상에 그 분야의 인지도를 한껏 높여 놓았지만 우리 일반인들이 보기에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술파트다. 비디오는 비디오이고, 아트는 아트인데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새로운 영역인가?

나름 아마추어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TV와 비디오를 소재로 입체적인 예술물을 만든 점이 남달랐다고나 할까.

기존의 동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단면 스크린이나 캔버스 등 평면체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비디오물은 조각처럼 입체적인 형태로 동영상을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 동영상이면서도 조각이나 조형물처럼 입체적이고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가져다 준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동영상 아트'는 영상물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또한 특이하다.

 그는 시공간도 마음껏 휘저었다. 전통과 현대, 미술과 비미술, 기술과 예술, 동양과 서양을 혼합하면서 경계를 넘나 들었디 기존에 구분된 장르별 콘텐츠를 그는 보기좋게 무너뜨리고 그 경계의 담을 허물어 버렸다. 비디오 동영상물이 과거 내용과 현대의 내용물이 혼재돼 나타나고,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듯 하다가도 픽션적인 영상물이 등장한다.

그런 작품세계는 우리가 보이기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 단순하고 즉흥적인 생각에서 나온 게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이해를 못할 뿐이다.

그의 공부 영역은 실로 넓었다. 일본과 독일에서 우선 음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나아가 물리학, 전자공학,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 미디어학까지 천착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독파했고 연구했다. 감히 그를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주변에 직업인으로서 자기 영역분야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

수십권이야 읽었겠지만 아마 100권 이상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국내서만이 아니라 외국 양서를 100권 읽은 사람이 있을까. 전공교수 정도라면 모를까. 그쯤되야 백남준의 한 분야 정도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게 솔직 할 것 같다.

그는 천재였다. 일제시대 경기중학교를 나왔다. 전국의 내로라 하는 아이들이 들어갔던 학교다. 집안도 좋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보다 이른 시기에 유학길에 오른다. 저간의 사정이야 있었지만, 그는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음악이고, 예술이고 그리고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라는 분야다.

그는 편안한 길을 택할수 있었다.아버지의 가업을 이었거나 아니면 평범한 교수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 가업은 분명 역동적인 한국현대사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이후 해방과 6.25전쟁, 5.16군사혁명을 거치는 동안 그의 사업은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일제시대 있었던 기업이 70년대에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5%도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천재가 혼란스런 상황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평범하게 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직업은 그나마 나은 생존가능성이 높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혜안이 번득이는 머리를 가진 천재에게는 한국은 너무 좁았음을 바로 느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외국으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다행이 집안 형편이 좋아 어린 나이에 해외로 간 것이 그나마 그와 대한민국에겐 천운이다. 1932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있는 갑을빌딩 자리가 그가 태어난 곳이다. 이후 서린개발이 서린호텔로 신축했다. 지난 80년대말 서린그룹이 부도난후 90년대초 갑을그룹이 경매로 인수한 후 새롭게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안에 내로라하는 갑부였다.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청나라로 부터 비단을 독점으로 수입해 국내 시판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아버지도 그 사업을 이어받아 당시 국내최대 섬유업체의 하나인 태창방직의 사장이었다. 한마디로 백남준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세상에 나온 셈이다.

지동차가 귀한 시절에 백남준의 집은 자동차 7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값비싼 캐딜락 자동차는 그 당시 국내 2대 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자동차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머리를 이어받았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메이지법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형제중 가장 명석했다고 한다. 선친으로부터 가업을 이어받았다. 백남준은 경기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누나의 어깨 너머로 피아노를 접했다. 연주를 곧잘하자 중학교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운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1948년 그는 홍콩으로 자의반 타의반 유학을 가게 된다.

아버지는 인삼수출을 위해 홍콩을 자주 오갔고 그래서 유학지도 홍콩으로 결정됐다. 당시 혼란스런 정치적상황을 간파해 아들을 피신시키려는 아버지의 생각도 있었다. 

6.25전쟁이 터졌고 백남준은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전전한다.무역상을 하는 아버지가 자주 다녔던 홍콩으로 유학한 그는 35년간 고국을 방문하지 못한다. 유학직후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아버지가 시국이 혼미한 것을 간파하고 그를 해외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늘 가슴에 묻고 해외를 떠 돈다.독일 등 유럽 각지로, 미국으로 유랑생활을 하며 예술의 혼을 불사른다.
6.25전쟁이 터졌고 백남준은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전전한다.무역상을 하는 아버지가 자주 다녔던 홍콩으로 유학한 그는 35년간 고국을 방문하지 못한다. 유학직후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아버지가 시국이 혼미한 것을 간파하고 그를 해외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늘 가슴에 묻고 해외를 떠 돈다.독일 등 유럽 각지로, 미국으로 유랑생활을 하며 예술의 혼을 불사른다.

백남준은 머리가 좋아 1952년 일본 동경대학 문과에 무난히 진학한다.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한다. 음악 공부를 더하고 싶어서, 그는 1956년 독일로 떠난다. 뮌헨대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 쾰른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한다.

1958년 백남준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와의 조우다. 그의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점이 된다. 이듬해 뒤셀도르프에서 그의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를 초연하며,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해프닝을 보였다.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를 발표,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고, 머리를 샴푸로 감는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선보인다. 괴짜 예술가로 비쳐질 정도로 전통 예술의 본령을 깨버렸다.이단아였다. 1961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와 첫 만남 이후 플럭서스(Fluxus)의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된다.

플럭서스(fluxus) 운동은 1960년에서 1970년대 이르기 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들의 정치적이고 일부는 극히 개인적인 욕구 또는 반항을 사회에 강하게 내던진 일련의 탈 장르적 표현들이다. 이 전위예술에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존 케이지 등이 함께 참여한다. 뉴욕의 소호와 그리니치 빌리지가 활동의 주무대다. 백남준도 소호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며 이 운동을 전면에서 활동한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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