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8 20:08 (수)
'인보사'의혹 코오롱…사회환원 힘썼던 이동찬 회장
'인보사'의혹 코오롱…사회환원 힘썼던 이동찬 회장
  • 장재열 이코노텔링 기자
  • kpb11@hanmail.net
  • 승인 2020.01.01 0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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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이원만 창업주와 '동업' …사세를 재계 15위로 올린 '1.5세대'기업인
1957년 국내 첫 나일론 공장 설립… 77년 회장 취임해 통신ㆍ제약업 초석
서거한 해에 노구 이끌고 자신이 만든 선행상 시상 참여가 마지막 공개행보
농구ㆍ골프ㆍ육상 등 스포츠 육성 앞장… 자서전 제목"벌기보다 쓰기가…"

코오롱그룹이 위기다. 계열사인 코오롱생명과학이 허위자료를 제출해 골관절염 유전자 치료제 ‘인보사케이주’(이하 인보사) 허가를 받았다는 의혹에 휩사여 있다. 지난 28일 성분 변경과 주식 상장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이우석(62) 코오롱생명과학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돼 코오롱은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지만 수사의 전개방향에 따라선 이웅렬 전 회장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전 회장은 평소 "20년 걸려 낳은 네 번째 자식"이라며 자부심과 애착을 드러낸 신약 바로 '인보사'였기 때문이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아버지 창업자 이원만 회장(왼쪽)을 도와 1957년 우리나라 최초의 나일론 원사공장을 준공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아버지 창업자 이원만 회장(왼쪽)을 도와 1957년 우리나라 최초의 나일론 원사공장을 준공했다.

이 회장이 지난해말 돌연  회장직을 내놓자 당시 재계일각은 뜻밖의 조기 퇴진에 의아해 했었다 

인보사는 지난 19년 동안 이 회장이 사내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1100억 원을 투자해 글로벌 시장에서 6조 원대 연 매출을 올릴 그룹의 차세대 수익사업으로 사운을 걸고 개발한 신약이다.

코오롱을 섬유산업 기반의 그룹규모로 키운 경영자는 이 전 회장의 선친인 이동찬 전 명예회장이다. 한 달 여 전 서거 5주기를 맞았다. 그는 2014년 11월 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당시 언론은 “한국 섬유산업의 큰 별 우정(牛汀)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요지의 부음을 세상에 전했다. 한국 재계를 수놓은 많은 기업인 가운데 이동찬 회장만큼 뚜렷한 문양과 색채를 남긴 이도 그리 흔치는 않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1981년 기자회견을 열고 마라톤에서 2시간10분이내의 기록을 세운 선수에게는 포상금 1억원을 주겠다고 말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시 1억원이면 강남 고급 아파트 2~3채를 살수 있는 돈이었다. 그게 밑거름에 돼 마라톤 열품이 불었고 10여년뒤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래서 이 명예회장은 한국마라톤의 아버지'로 불린다. 사진은 금메달을 떤 황영조 선수를 격려하는 모습.
이동찬 명예회장은 1981년 기자회견을 열고 마라톤에서 2시간10분이내의 기록을 세운 선수에게는 포상금 1억원을 주겠다고 말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시 1억원이면 강남 고급 아파트 2~3채를 살수 있는 돈이었다. 그게 밑거름에 돼 마라톤 열품이 불었고 10여년뒤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래서 이 명예회장은 한국마라톤의 아버지'로 불린다. 사진은 금메달을 떤 황영조 선수를 격려하는 모습.

그는 기업인이면서도 예술과 스포츠 분야에 이름을 남겼는가 하면 노사협력이나 사회사업 분야에서도 인 고(故) 이원만 회장이다. 아들 이동찬 은 정·재계를 오가며 사업을 했던 부친 이원만 회장을 도와 한국 화섬(化纖) 산업의 원조인 코오롱그룹을 축성한 인물이다. 그래서 재계는 그를 ‘1.5세 기업인’남다른 족적을 남겼다.

코오롱그룹 창업자는 이동찬 회장의 부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부친에게서 코오롱그룹을 물려받아 경영한 게 아니라 동업을 통해 코오롱그룹을 일으킨 사람이란 뜻이다.

1922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오사카 흥국상고와 와세다대(전문부 정경과 2년 수료)를 다녔다. 35세 때인 1957년 4월 부친과 함께 대구에 코오롱의 모태인 한국나이롱을 설립하고 국내에 처음으로 나일론 공장을 지었다.

이원만 회장은 나일론 수입을 목적으로 1954년에 개명상사란 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이어 1957년엔 나일론을 직접 생산할 목적으로 나일론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6·25전쟁 후 의류 수요가 폭증하면서 나일론 수요도 덩달아 급증한데 착안했다. 이때 약관 35세의 이동찬 회장이 동업자로 참여하게 된다.

KOrea nyLON(코리아 나일론)에서 따온 코오롱(KOLON)을 상호로 삼았을 정도로 나일론은 코오롱그룹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됐다. 국내 최초로 나일론 생산에 뛰어들어 화섬 업을 이끌면서 당시 면방(綿紡)업 위주였던 당시 한국 섬유산업을 ‘면방과 화섬’ 양대 축으로 재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창업자이자 부친인 이원만 회장과 함께 코오롱그룹을 중흥시킨 이동찬의 사업이력은 대개 다음과 같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199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림 그리기와 사회환원 활동에 몰두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199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림 그리기와 사회환원 활동에 몰두했다.

1957년 한국나이롱(코오롱) 창립, 1958년 동사 전무, 1970 동사 사장, 1971년 한국폴리에스터 사장, 1977~1995년 코오롱그룹 회장, 1996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등이다. 1977년 그가 그룹 회장에 취임하면서 당시 73세였던 부친 이원만 창업 회장은 후선으로 물러났다.

재계는 이동찬을 1960~70년대 한국 화섬 산업 발전을 이끈 산증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1977년 그룹회장 취임 이후론 화섬업 중심이던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건설·제약·전자·정보통신 등으로 넓혔다. 그 결과 코오롱그룹은 한때 재계 순위 15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40년에 걸쳐 코오롱그룹 경영 일선을 지켰고 그 중 약 절반 정도인 19년을 회장으로 그룹 경영을 총괄했다. 1957년 35세 때 경영에 참여해 1996년 74세 때 외아들(이웅렬)에게 회장직을 넘겨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이후 18년 동안은 사회사업을 하거나 화가로써 그림을 그리는 등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세상을 떠났다.그는 말년에 붓을 들고 자연 풍광을 많이 그려 마침내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늦깎이 화가가 됐다. 1주일에 3~4일씩 그림그리기에 몰두했다. 그림을 모아 전시회도 몇 차례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국 굴지의 기업인이 모자를 눌러 쓰고 팔레트와 붓을 든 채 빙그레 웃는 모습에서 많은 이들이 색다른 인간미를 느꼈다.

이동찬은 코오롱그룹에만 자신을 가둬두지 못했다. 경제계 전체 일이나 스포츠 육성 등에도 자신의 경험과 돈, 시간을 흔쾌히 내놓으며 더불어 사는 삶을 몸으로 실천했다.

고 이동찬 명에회장은 자신이 아호를 따 만든 우정선행 대상 시상식에는 꼭 참석했다. 서거하던 해인 2014년 시상식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공개행보였다. 이 명예회장이 수상자를 격렬하는 모습. 사진=코오롱.
고 이동찬 명에회장은 자신이 아호를 따 만든 우정선행 대상 시상식에는 꼭 참석했다. 서거하던 해인 2014년 시상식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공개행보였다. 이 명예회장이 수상자를 격렬하는 모습. 사진=코오롱.

그는 1982~95년 사이 14년 동안이나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으로 노사 상생을 위해 진력했다. 특히 노사 갈등이 심각했던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 남들이 꺼리던 경총 수장을 연거푸 맡아 노사 협력을 다졌다. 또 1983년 제3대 섬유산업연합회(섬산연) 회장을 맡아 섬유 업계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1987년엔 경제단체협의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체육계를 위한 그의 봉사 활동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1970년, 1977년), 대한농구협회 회장(1980년), 대한골프협회 회장(1985년),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위원장(1996~98년) 등을 맡아 헌신했다. 무엇보다 비인기 종목인 마라톤과 육상의 중흥을 위해 1985년부터 매년 ‘코오롱 구간 마라톤대회’를 주최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코오롱 오운문화재단을 설립해 사회활동에도 힘썼다. 돌아가기 반년 전쯤인 2014년 4월에 열린 제14회 ‘우정선행상’에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참석해 수상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우정(牛汀)은 이동찬의 호이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이 말은 나의 등산식 경영 철학이자 등산을 통해 터득한 교훈이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교훈과 함께 등산하는 기분으로 회사를 경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4월 발간한 자서전(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을 통해 그가 남긴 말이다. 코오롱그룹 경영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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