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7:30 (금)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5) '철의 여인'㊦“국민이 선택한 개혁”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5) '철의 여인'㊦“국민이 선택한 개혁”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12.23 23: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치매노인으로 분신한 '데처수상'의 기억으로 풀어 낸 영국병의 치유과정
보조금으로 연명하던 44개 공기업 민영화 했더니 15억파운드 稅收효과
실업급여 5% 줄이고 노조의 비대한 힘 견제 하자 파업 줄고 산업에 생기

영화 '철의 여인'은 한 평범한 노인에게서 시작된다. 족히 80은 넘어 보이는 이 노인은,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고 다른 손님에게 새치기를 당하고 새치기 한 손님을 흘겨보고 우유 값을 묻고 지갑에서 직접 돈을 꺼내 점원에게 주고 잔돈을 받아 우유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우리 동네 어디서고 볼 수 있는 그야말로 '보통 사람'이다. 집에 와서는 딸과 함께 TV를 본다. 이것도 별 다를 게 없다. 때로는 '평범 아래'로 보이기도 한다. 이미 저승에 간 죽은 남편과 대화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니 치매노인, 그것도 중증 치매노인인 탓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혀 차는 소리를 낼만도 하다.

하지만 TV에 비친 테러 장면과 함께 그가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가 평범한 노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때 대영제국의 수상으로서, 천하를 호령하던 여장부 마가렛 대처가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예전의 그 여장부가 아니다. 치매에 걸린 상태에서 옛날을 회상하는, 그저 그런 힘없는 노인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단초는, 그에게, 어둠에 갇힌 과거에 빛을 주는 스위치의 역할을 한다. 현실의 삶 속에서 기억의 매듭이 하나 잡히면 그걸 끌러 과거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영화 <철의 여인>은 이 평범한 치매 노인의 회상을 통해 여장부 대처를 그리고 있다.

현재의 삶을 한 축으로 삼아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 즉 2중 플롯의 영화는 많다. 이런 영화는 보통 현재 삶보다는 과거의 스토리를 강조하거나 두 삶의 인과관계를 그린다. 하지만 영화 <철의 여인>은 그 같은 '평범한 영화'와 몇 가지 측면에서 대비된다. 우선, 현재의 삶은 과거의 삶과 아무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이며, 둘째, 그럼에도 현재의 삶이 결코 과거의 삶보다 경시되지 않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보통의 치매 노인이 갖고 있는 신통치 않은 '현재' 회상 능력을 통해 과거를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중 중요한 것은 아마도 세 번째 특기 사항, 즉 관객에게 치매노인의 기억 능력으로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려 한다는 점일 것이다.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치매노인의 시각에서 그의 과거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미 죽은 남편이나 딸과 대화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의 과거는 빠르게 흔들리는 만화경(萬華鏡)처럼 들쭉날쭉 뒤죽박죽 정신이 없다.

당연히 그의 과거는 단편적이고 파편화 돼 있다. 그래서 답답하다. 노인체험센터에 가서 흐릿한 안경을 쓰고 무거운 쇠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 보라. 그러면 고령자의 고통을 알 수 있다. 이른바 '고통의 간접 체험'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같은 치매노인이 과거를 회상할 때 겪는 어려움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령자 체험관에 비치돼야 할 영화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영국의 수상을 지낸 인물이다. 그것도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1년 동안,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영국 최고 권력자 자리에 앉았던 영국 역사상 최장기 수상이다. 그런 그이니 만큼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영국의 현대를 그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같은 치매노인의 불완전한 과거 회상법으로 우리는 그 중요한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한 나라의 수십 년 역사커녕 치매를 앓고 있는 본인 개인사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치매에 걸린 노인인 ‘현재의 대처’가 ‘과거의 대처’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과거의 대처’를 회상하는 역사적 장면들은 파편화돼 있으며 특정 사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이해가 어렵다. ‘현재의 대처’가 편의점에 들른 날 신문에 실린 테러(사진)와 ‘과거의 대처’가 겪은 테러,하지만 두 테러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
영화는 치매에 걸린 노인인 '현재의 대처'가 '과거의 대처'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과거의 대처'를 회상하는 역사적 장면들은 파편화돼 있으며 특정 사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이해가 어렵다. '현재의 대처'가 편의점에 들른 날 신문에 실린 테러(사진)와 '과거의 대처'가 겪은 테러,하지만 두 테러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그가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며 본 신문 1면에는 테러 관련 기사가 나온다. 영화가 그의 회상을 위해 기획한 첫 번째 단초다. 하지만 그게 다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난 테러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힌트는 있을 뿐이다. 신문과 기사 제목. 신문은 『데일리 스타(Daily Star)』, 제목은 '호텔 폭파와 영국의 두려움(Fear for Brits in hotel blast)'이다. 집으로 돌아온 대처는 딸과 함께 TV를 본다. TV에서는 또 다시 신문 머리기사로 실렸던 테러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테러 장면은, 마침내, 치매 노인 대처가 과거 기억의 실 한 자락을 당기게 해 준다.

TV를 통해 테러 장면을 보는, 영화 속 대처의 현재와 그로 인해 떠올려지는 대처의 기억 속 테러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현재'와 '과거'의 두 테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치매에 걸린 대처는 그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두 개 테러가 언제, 왜, 어떻게 이뤄졌는지 아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알기 어렵다. 영화 속 대처는 이를 알 수도, 알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게 있다. 관객은 이 두 개의 테러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테러가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벌어졌는지 말이다.

이를 알고 싶은 관객은 집중력을 발휘해 뚫어지게 스크린을 보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이 두 개 테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영화를 본 뒤, 영화에서 준 힌트를 이용해 따로 품을 팔아야 한다. 힌트는, 이미 말했듯, 신문 『데일리 스타(Daily Star)』와 그 1면 기사 제목에 있다. 이 두 개의 키 워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자. 신문과 TV 속 테러는 2008년 9월 21일 파키스탄 메리어트 호텔에서 벌어진 알카에다의 자폭 테러다. 또한 그가 회상하는 과거 속 테러는, 아일랜드 독립을 주창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의 브라이트 그랜드 호텔 테러다. 이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1984년'이라는 자막을 통해 알 수 있다.

‘과거의 대처’가 겪은 테러 장면.
'과거의 대처'가 겪은 테러 장면.

이 대목에서 필자는 독자에게 중요한 팁 하나를 줄 수 있다. 영화 속 대처의 '현재'는 2008년 9월 21일 전후이며, 당시 대처의 나이는 83세라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또 있다. 이 해는 영화 <철의 여인>이 개봉되기 4년 전이며 대처가 죽기 5년 전이라는 점이다. 이 같은 몇 가지 사실은 영화 개봉 이후 7년이 지난 뒤에야, 이 글을 통해, 처음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는 이 같은 영화의 배경을 알려주지 않고, 영화 속 신문기사를 참고로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는 독자나 평론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관객이 영화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알려면 영화 속에 잠간 등장하는 신문과 그 신문의 기사 제목을 통해 직접 찾아봐야 한다? 관객을 위한 정보제공에 매우 무신경한, 어쩌면 관객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공급자 위주'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신문 1면에 날짜만이라도 있었다면 이 같은 고생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마저 없다. 바로 이것이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 배우의 불후의 연기에도 영화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테러의 뒤를 이은 장면 몇몇을 보자. 마찬가지다. 여전히 영화는 치매 노인의 '현재 삶'과 '과거 삶'을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국과 유럽의 현대사 일부를 안다면 영화 속 대처의 회상 장면이 연대기별로 제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역사 지식을 갖고 있다 해도 대부분의 영화 속 장면이 도대체 무슨 일, 무슨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회상 사건은, 느닷없이 등장하는 '편린'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보자. 영화의 주요 역사적 장면은 다음 순으로 등장한다.

①1959년 선거에서 첫 번째 당선으로 정계 데뷔. 그나마 이 장면은 앞뒤 맥락을 통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②의회. 교육부장관 시절 학교 폐쇄를 주장. 영화 속 대처 당시 장관은 의회 연설에서 "교사들은 빛과 난방 없이 수업할 구 없다"며 폐쇄 이유를 제시한다. 노동당 의원들은 "필수적인 공공, 운송, 전기, 하수 서비스가 고장 난 것은 노조 탓이 아니다"라고 외친다.③이어지는 히스 내각의 각료 회의. 히스 수상은 "조합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폭넓은 합의를 원한다. 현재 상황에 불을 붙일 일을 해서는 안 된다"며 타협을 제시하며 오직 대처 장관만 이에 반대한다. 이 역시 애매하다. 학교 폐쇄를 주장하는 앞 장면과 연계성이 있는 것인지조차 알기 어렵다.④느닷없이 '1974년'이란 자막이 뜨면서 "정전에 기름은 떨어지고 히스 수상은 합의에 서명할 것"이라는 라디오 뉴스 방송이 들린다.⑤전후 설명 없이 대처가 보수당의 당 대표 선거에 나가 당선되며 그의 대변인 에어리 니브가 테러로 죽임을 당한다.⑥대처가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1974년 일이다. 영화는 이 장면 뒤에 아무 설명 없이 1979년 총선거로 점핑하며 이 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 대처가 마침내 수상이 됐음을 알린다.⑦수상 취임 장면에 이어 시민들의 데모와 각료들의 긴축재정에 대한 문제점 지적한다. 이 역시 앞뒤 설명이 없다.⑧다음 장면은 격렬한 탄광 파업 장면. 이 장면의 의미도 알 수 없다.⑨의회 내 노동당의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보수당 정부 아래 영국은 사상 최악의 실업률과 산업생산성에 신음한다고 주장한다.⑩내부 각료들도 긴축재정 정책에 반대한다. 긴축재정이 파업과 실업, 데모, 생산성 등과 연계되는 것인지, 된다면 어떻게 연계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⑪갑자기 다시 탄광 파업 장면이 전개된다.⑫탄광 파업 진행 중 이번에는 IRA 테러 장면 삽입.⑬여기에 느닷없이 포클랜드 전쟁 장면이 삽입된다. 많은 내부 인사들의 반대에도 오직 대처의 굳센 결의로 전쟁이 시작되고 승리한다. 대처는 사망자 부모에게 친필로 편지를 보내 애도를 표한다.⑭베를린 장벽 붕괴 장면이 나온다.⑮대처가 EEC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⑯이번에는 세금 문제로 시민 궐기가 일어난다. 이 역시 앞뒤 설명이 없다.⑰당 대표에서 탈락된다. 주변의 음모라는 분위기를 암시하지만 분명하지 않다.⑱결국 대처는 당을 떠나고 정계를 은퇴한다.

영화 <철의 여인>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을 간단히 나열해 봤다. 20개 가까운 사건의 장면이 숨 가쁘게 넘어간다. 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이다. 그나마 몇몇 주제가 눈에 들어온다는 게 다행이다. 간헐적으로 지속되는 파업, 세금, 긴축재정, 실업과 생산성의 문제, 테러와 전쟁,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문제 등이다. 하지만 역사적 시각에 본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특정 장면에서 왜 특정 사건이 나오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영화는 빠른 터치로 대처의 중요한 정치적 삶을 그린다. 1973년 교육ㆍ과학부 장관시절 1975년 당대표 취임장면.
영화는 빠른 터치로 대처의 중요한 정치적 삶을 그린다. 1973년 교육ㆍ과학부 장관시절 1975년 당대표 취임장면.

영국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관객이라면 영화 속 사건 전개가 연대기 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보통의 관객이라면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치러진 것으로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보다 8년 앞선다. 영화는 당연히 포클랜드 전쟁을 먼저 보여준다. 하지만 포클랜드 전쟁이 베를린 장벽 붕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관객은 얼마나 될까?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가 아니라 '졸지 않고 끝까지 보기 위해'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로는 전장의 파편처럼 때로는 강가의 자갈처럼 여기저기 흩날려 있는 영화의 역사적 장면들은, 그 배경과 인과관계라는 실로 잘 꿰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관람 자체가 힘들다는 얘기다.

우선, 대처의 교육부 장관 시절을 보자. 영화에서 그나마 친절하게 연도 표시를 해 준 사건이 몇몇 있다. 대처의 정계 데뷔도 그중 하나다. 그는 1959년 10월 선거에서 하원의원에 당선, 정계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대처는 다양한 행정부 책임을 맡았는데, 1965년 국가보험 정무차관으로 첫 관료의 경험을 쌓았고 이어 히스 수상이 이끄는 내각 아래서 토지ㆍ주택장관과, 교육과 과학을 담당하는 교육과학부 장관직을 수행했다.

1979년 수상 퇴임장면
1979년 수상 취임장면.

그가 교육과학부 장관직을 맡았던 것은 1970년이었다. 이 글 내내 말했지만 영국의 1970년대는 고난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교육 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대 들어 계속되던 파업이 아이들 교육까지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대처는 노조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겪었는데, 첫째, 1971년 교육재정을 줄이기 위해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여성'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초등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주던 우유를 중단시켰던 일과 둘째, 심각한 파업의 결과 학교에 히터와 전기까지 끊기자 1973년 그는 학교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 일이 그것이다.

1973년 '학교 폐쇄' 사건은 마침 1974년 선거 직전에 벌어진 일이라 더 주목을 끌었다. 당시 노조의 힘은 막강했다. 집권 여당 보수당이라도 정면으로 부닥치기를 꺼렸다. 히스 수상도 그랬다. 노조의 일부 주장을 받아들여 타협점을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노조가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예 정권을 바꾸겠다며 더욱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더 놀라운 것은 노조가 이 싸움의 승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1974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노조와 힘을 합친 노동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히스 수상의 참담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본인의 선거마저 패배함으로써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로써 보수당은 당수마저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별 볼 일 없는 정당 신세가 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강력한 리더십. 이때 보수당 재건이라는 막대한 책임을 지고 등장한 이가 바로 대처였던 것이다. 그해 11월 21일 당대표선거에서 그는 승리하며 마침내 당권을 장악하게 된다. 평범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었던 그가 당 대표까지 맡게 됐던 것은 그만큼 그의 리더십이 강력했음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이해했다면 이제 영화의 편린들 ①②③④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①~④까지의 장면은 모두 대처가 수상이 되기 이전 일이다.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그가 노동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다수당이 되고 그 당의 수장으로서 한 나라의 수상이 된 것은 1979년 선거를 통해서였다. 이 해는 영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역사에서 매 해 중요하지 않은 해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현대사에서 1979년이 중요했던 이유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이 견지해 왔던 노조 및 복지 중심의 사회민주주의의 패러다임이 거의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 모두는 피폐해져 가고 있었으며 이는 1979년 '불만의 겨울'이라는 말로 표징(標徵)됐다. 그해 선거는 구시대의 유물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를 이끈 신보수주의자 대처와 레이건.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이들의 정책은 냉전시대를 승리로 끝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1981년 7월 21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가졌던 정상회담 뒤 모습이다.
1980년대를 이끈 신보수주의자 대처와 레이건.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이들의 정책은 냉전시대를 승리로 끝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1981년 7월 21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가졌던 정상회담 뒤 모습이다.

대처가 정권을 잡은 것은 이 같은 상황 아래에서였다. 당연히 그는 새로운 리더로서의 의무를 부여받았고 새로운 리더십은 전후 영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를 지배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야 했다. 그는 이 같은 시대적 요구를 과감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ㆍ경제ㆍ사회질서를 꾸며나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미국의 정책이 '레이노믹스'로 대변된다면 영국의 당시 정책은 이른바 '대처리즘'으로 대변됐다. 그리고 대처리즘의 핵심에는 흔히 '신자유주의'로 불리던 정책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핵심에 미국 시카고대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교수의 '통화주의(monetarism)'가 있다. 이제 대처리즘의 핵심인 통화주의로 시작해 대처의 정책을 살펴보도록 하자.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경기를 살리려면 금리를 내린다'는 것은 이제 웬만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경제정책의 상식과도 같은 말이다. '금리를 올리면 외부 자금이 유입됨으로써 투자를 끌어들이고 환율을 낮추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는 말도 이제 거의 상식에 속한다. 이 같은 정책의 배경에는 300년 전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나 데이비드 흄(David Hume) 등 경제학자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현대적 의미로는 앞서 말한 프리드만의 '통화주의'에 기초한다.

'통화의 유통량'을 중시하는 이 같은 통화주의는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즈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다. 재정 확대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고 이로써 세수가 늘어나면서 재정적자가 해소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통화주의는 보수주의가 선호하는 이론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도 통화주의 중심의 정책을 권고한다. 영국 대처정부는 보수주의다. 당연히 통화주의 정책을 펼친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은 이 정책이야말로 '영국병'에 신음하던 영국을 구원한 것으로 평가한다. 대처 정부 초기 영국의 경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대처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인플레였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와 지속적인 임금인상이 인플레 촉발 요인이었다. 그가 총선에서 승리한 1979년 5월도 마찬가지였다. 원유 값 상승이 임금인상을 부추겼고 최소한 저임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론은 세금. 결국 소비세로 알려진 부가가치세(VAT)를 8~12.5%에서 15%로 인상하였다. 부가가치세의 인상은 실질적인 세수에 큰 도움이 됐다. 1979년 한 해 동안 42억 파운드의 부가가치세가 걷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총 세수에서는 큰 수확을 걷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왜냐하면, 대처정부는 최상위 소득계층의 소득세를 대폭 낮춤으로써 세입감소 효과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79년 소득세 감축으로 세수는 45억 파운드 감소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초기 대처 정부는 금리 인상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 13% 수준이었던 금리가 17%까지 치솟았다. 이는 경제에 중요한 몇 가지 효과를 가져왔는데, 인플레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게 첫째다. 금리 인상으로 대처 정부는 1970년대 중반 25% 수준이었던 인플레를 1980년대 초 20%대로, 1983~87년 동안에서 4~5%대로 낮출 수 있었다. 금리 인상은 또한 환율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금리인상으로 1970년대 중반 1.5달러였던 파운드화는 1980~81년 사이 2.5달러로 치솟았다. 마지막으로 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효과다. 제조업 생산이 1979년 봄 이후 1년 사이 17.5% 하락했고 그 결과 1979년 120만이었던 실업자는 1982년 30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대처 정부의 경제정책 중 또 하나의 특징은 적극적인 공기업 민영화에 있었다. 이는 노동당 정부의 기업 국유화 또는 공기업화와 확실히 차별화되는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 대처 정부는 엄청난 재정지출과 그로 인한 비효율, 그리고 재정적자라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굵직굵직한 민영화 사례를 보자. 거대 국영기업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브리티시 오일, 롤스로이스, 케이블 앤 와이어리스, 브리티시 에어웨이 등이 민영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출범 초기부터 민영화를 단행한 대처 정부는 1991년 "그 동안 44개 주요 기업이 민영화됐다"며 "이들은 1978~79년 사이 1900만 파운드의 정부보조금을 받은 반면 민영화 이후 1989~90년 사이 15억 파운드의 세금을 납부했다"며 민영화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재정 적자를 줄이려는 대처 정부의 정책은 사회복지정책에도 적용됐다. 사회복지의 퇴보는 불을 보듯 뻔하다. 대처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의 슬로건은 '자조(自助)'. 즉, 정부 도움 없이 스스로 돕고 살라는 의미였다. 대표적인 것이 실업수당이다. 대처 정부 초기의 긴축정책은 앞서 말한 대로 실업을 양산시켰다. 이로 인한 실업수당은 대처 정부의 큰 짐이었다. 결국 1980년 사회보장법을 개정, 급여산정 방식을 소득이 아닌 물가에만 연동시키도록 함으로써 실업급여를 약 5% 삭감시켰다. 1982년에는 질병급여와 실업급여와 소득비례급여를 폐지해 실업자들은 동등한 비율의 기본 급여만을 지급했으며 1983년에는 실업급여의 수급자 규정을 까다롭게 만들어 급여수령 포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영화는 대처 시대의 경제 관련 사건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배경 설명 부족으로 사건의 발생 시기와 성격, 전후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진은 1974년 파업 장면.
영화는 대처 시대의 경제 관련 사건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배경 설명 부족으로 사건의 발생 시기와 성격, 전후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진은 1974년 파업 장면.

이제 마지막으로 대처 정부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제시되는 노동정책을 보자. 1970~80년대 영국 노조가 갖고 있던 강력한 힘의 원천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가 클로즈드 숍(Closed Shop) 제도로, 기업에 입사하는 모든 근로자는 무조건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거꾸로 노조에서 쫓겨날 경우 회사를 그만둬야 것이어서 노조원에 대한 노조의 권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특정 노조는 다른 산업 또는 다른 회사 노조의 파업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73년 말부터 1974년 초까지 약 3개월 간 지속된 탄광노조 파업은 전기 등 다른 산업 노조까지 참여 단전(斷電)이나 조업 시간 단축 등의 형태로 참여했다. 또한 노조 위원장이나 간부 등의 선출, 파업 실시 시 노조원은 공개투표로 선출됐다. 파업에 반대할 경우 찍힌다.

대처 정부는 이처럼 강력한 노조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민영화 정책이나 실업수당 정책도 간접적으로는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하지만 대처 정부는 이 정도 간접적 방법만 쓴 것이 아니다. 출범 직후부터 법적 규제를 시작했다. 1980년, 1982년, 1984년 등 모두 세 차례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노조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클로즈드 숍 제도를 없앴고 다른 산업 노조의 파업에 대한 동참 금지, 파업 등 노조의 주요 선거에서 비공개 투표의 원칙 등을 적용시켜 노조의 강력한 힘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연도를 알기 어려운 조세저항 장면.
연도를 알기 어려운 조세저항 장면.

이 같은 제도 변화에 노조는 강력 반발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반대에 부닥칠 때마다 오히려 "국민은 우리를 선택했다"며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국 대처는 승리했다.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승리의 결과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노조 및 노조원 수가 감소했다. 1979년 453개였던 노조의 수는 10년 뒤인 1979년 309개로 줄었고 1979년 710만 명에 이르렀던 노조원수는 1990년 497만 명으로 줄었다. 또한 산업분규 건수 및 일수도 줄었다. 1970년대 연간 동맹파업 건수는 늘 2000건을 웃돌고 최고 4000건 가까이 육박했으나 1980년 이후 600~1600건으로 줄었고 한 해 1970년대 1300만일에 육박했던 연 평균 근로 손실일수는 1980년대 들어 700만일로 줄었다.

이 같은 효과는 실제 노동운동에 즉각적으로 반영됐다. 1984~85년 광부파업이 대표적인 사례일 수 있다. 국영석탄위원회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탄광을 폐쇄하려 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격렬한 파업이 일어났는데, 국영 광부연합이 다른 노조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대처정부의 법안 변경으로 '불법'이 됐기 때문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 광산노동자의 파업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는 거꾸로 노조에 대한 대처 정부의 승리를 알리는 상징이 됐다.

이 글을 다 읽은 독자라면 이제 영화 <철의 여인>을 다시 한 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치매노인의 조각 난, 그래서 그 현상도 원인도 결과도 알 수 없었던 '기억의 역사'는 이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을 우리는 '역사 해석' 또는 '역사 인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영화 <철의 여인>에는 이 부분이 누락돼 있다. 누차 강조했듯 영화에는 역사의 '조각 난 파편'만 있기 때문이다. 필리다 로이드 감독이 <맘마미아>에서 보여준 자신의 출중한 역량을 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또한 영화에 주요 화두로 등장하는 포클랜드 전쟁과 테러, EEC와의 관계 등을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