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00:15 (일)
◇칠레 현지 취재 2信= '꺼지지 않은 폭동 불씨'
◇칠레 현지 취재 2信= '꺼지지 않은 폭동 불씨'
  • 산티아고 (글ㆍ사진)=성태원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 iexlover@hanmail.net
  • 승인 2019.12.2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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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격인 이탈리아 광장엔 '모닥불 시위대' … 전투복 차림의 경찰, 출입 통제
국민 소득 한국의 절반인데 물가는 비슷 …月최저임금 50만원 서민 생활고 불만 분출
높아진 의료ㆍ교육ㆍ공공요금 부담에 쌓인 분노 '지하철 50원 인상'이 불쏘시개 역할
“칠레는 깨어났다.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 벽보 구호가 개혁에 대한 칠레인 열망 읽혀
빈부격차 해소 새헌법 제정요구 수용…경제 구조개혁보다 좌파포퓰리즘 의존 우려도

12월 15일(일)엔 산티아고 시내 곳곳을 둘러봤다. 주말, 휴일에 오히려 교통 사정이 좋아지는 이곳 사정이 믿기지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시내 외곽 몇 군데서 장갑차를 길가에 세워 둔 채 전투복 차림을 한 경찰들이 사뭇 긴장한 모습을 하고 대기 중인 것을 목격했다. 시위 사태가 잠복 중이라는 점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칠레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 옆 한 동상에 그려진 각종 구호들.
칠레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 옆 한 동상에 시위대들이 써놓은 각종 구호들. 그런 글에는 “칠레는 깨어났다.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문구도 있다.

칠레 시위의 메카로 불리는 ‘이탈리아 광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의 광화문 광장에 비유되는 곳이다. 광장을 목전에 둔 도로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가능하면 다른 데로 차를 돌려가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신호가 바뀌고 다른 자동차가 와락 몰려드는 때를 이용해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광장에 도착했다. 일요일 오후 4시께였다.

광장에 큰 인파는 없었지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서거나 자전거를 타고 도로 위에 작은 불을 피워 놓은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치 시위의 불씨를 살려나가겠다는 몸짓처럼 보였다. 광장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마누엘 바케다노 장군(남미태평양전쟁 영웅) 동상과 인근 건물 곳곳에 형형색색의 구호가 빼곡히 적혀 있는 등 시위의 흔적은 아직도 역력했다.

칠레 시위의 도화선이 된 것은 10월 6일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최대 30페소(50원 상당) 인상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방아쇠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거대한 화산 폭발도 처음엔 사소한 가스 분출이나 뜨거운 물 분출로 시작한다. 안에는 용암이 이글거리고 있으나 겉으로는 가스나 뜨거운 물 정도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칠레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학생들이 지하철 요금을 내지 않고 타는 등 항의성 시위로 시작했다. 10월 18일에 이르자 시위가 점차 본격화되고 과격해졌다. 직전에 오른 전기요금과 맞물려 잦은 공공요금 인상에 대한 불만 표출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광장 인근의 건물에는 시위대의 목소리를 담은 구호가 쓰여져 있다. 두 달전 시위현장의 치열함을 말해주는 듯 하다.
이탈리아 광장 인근의 일부 건물에는 시위대의 목소리를 담은 구호가 쓰여져 있다. 두 달전 치열했던 시위 현장을 기억하는 듯 하다.

 마침내 소득에 비해 턱없이 높은 교육비와 의료비 등으로 화살이 옮아갔고, 형편없이 낮은 임금과 연금 등에 대한 개혁 요구로까지 연결됐다.

칠레 1인당 국민소득(1만6천 달러 상당)은 한국의 절반 수준이지만 물가는 한국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어 보니 물가 수준이 서울에 결코 뒤지지 않아 보였다. 빈부 격차가 워낙 심하다 보니 단순 평균한 1인당 국민소득은 칠레에선 단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칠레의 올해 최저임금은 월 30만1천 페소로 우리 돈 50만원도 안 된다. 최저임금 정도의 월급으로 살아가야 하는 서민들로선 현실을 감당하기에 힘이 든다. 마냥 참고 살아 왔던 서민들이 이번에 폭발하며 시위대에 합류한 것이다.

수 십 년에 걸쳐 구축된 칠레의 고질적인 경제 불평등과 소득 양극화가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다.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여러 번 바뀌어도 빈부 격차가 해소되지 않자 반감이 커질 대로 커진 것이다. 그동안 중남미에서 좀 사는 나라로 비쳐졌지만 수십 년 동안 내부는 곪을 대로 곪았다는 지적이다. 칠레의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다)는 2017년 기준 0.46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역시 2017년 기준 칠레 상위 1%의 부자들이 부의 26.5%를 소유할 정도로 소득 양극화도 심하다. 하위 50%가 2.1%에 불과한 부를 나눠 갖는 구조다.

시위대들은 시내 곳곳에 “30페소가 아닌 30년(때문)”이라는 문구를 보란 듯이 써놓았다. 지하철 요금 30페소 인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커져만 간 사회 부조리를 이젠 더 이상 참기 힘들어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얘기다. 1990년 민주화 이후 좌·우파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1973∼1990년) 17년 동안 구축했던 사회·경제 체제는 별로 바뀐 게 없이 이어져 왔다.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개해 칠레 경제 덩치는 키웠을지 몰라도 부의 편재와 불평등 구조는 더욱 강화됐다.

칠레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의 마누엘 바케다노 동상 앞에 선 필자. 시위가 소강 상태여서 주위가 비교적 조용하다.
칠레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의 마누엘 바케다노 동상 앞에 선 성태원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시위가 소강 상태여서 주위가 비교적 한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밀려 칠레 정치권은 마침내 새 헌법 제정 국민투표를 내년 4월에 실시키로 합의했다. 칠레 헌법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1980년 제정됐다. 이 헌법은 국민의 의료와 교육, 연금 등에 대한 국가 책임이나 국민 참여 등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 왔다. 이번의 국민 저항에 부딪혀 대수술을 앞두게 된 것이다.

성공한 기업가 출신의 중도 우파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당초 새 헌법 제정은 받아들이되 의회에 초안 작성을 맡겨야 한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시민들도 참여하는 개헌의회 구성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에선 칠레도 힘든 구조 개혁보다 손쉬운 좌파 표퓰리즘에 기대는 것 아니냐며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내년에 새 헌법 초안을 마련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하기까지는 시간과 절차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사태 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시위대들은 새 헌법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 유지에 필요한 교육과 의료보험, 연금 개혁에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길 원하고 있다. 시위대 중 누군가가 벽에 써둔 “칠레는 깨어났다.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는 구호가 개혁에 대한 칠레인들의 강한 열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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