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신임속 주변의 따까운 시선 아랑곳 하지않고 오로지 경제중흥 헌신
김학렬은 지병으로 김재익은 아웅산 테러사고 때 운명을 달리한 國弓盡疩
나라경제가 어려워지고 ’경제컨트롤 타워의 부재‘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지적이 적잖은 요즘. 60년대와 80년대초 그 어렵던 경제 위기에서 나라를 일으켰던 대통령의 경제참모가 떠 오른다.
박정희대통령에게 김학렬이 있었다면 전두환대통령 곁에는 김재익이 있었다. 이 둘은 ‘대통령의 경제 선생’이자 경제의 뼈대를 곧추세운 이코노미스트였다.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에 유학한 경제관료여서 국제적인 감각도 뛰어났다.
김학렬 전 경제 부총리의 별칭이 쓰루(鶴ㆍ일본어)였는데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성품 또한 학과 같았다. 김 부총리는 경제 중흥의 확장정책을 앞장서 이끌었고 김재익은 성장의 과실을 보다 고르게 나눠야 한다며 물가 안정에 사력을 다했다. 둘은 헌정을 무너뜨려 집권한 군 출신 대통령을 가르쳤지만 ‘경제’ 하나만은 누가뭐래도 대통령을 설득하고 바르게 이끌었다. 이들 만큼의 파워를 가진 경제관료는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예측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늦은 밤에 청와대를 나와 서울 혜화동에 있던 김학렬(1923~1972)의 집을 곧잘 찾았다. 둘은 동동주마시며 나라경제를 걱정했다. 그러니 ‘안주’는 늘 경제 현안이다. 그러다가 흥이 오르면 ‘황성옛터' 합창이 울려 퍼졌다. 밤늦게 술 시중을 들여야 했던 김 전 부총리의 아내가 고단한 표정을 지으면 박 대통령이 한 술을 더 떴다.
박 대통령은 "이봐요. 당신 바캍 양반은 내 과외 선생이오. 내가 경제를 배우러 과외 선생 집에 오는데 뭐가 잘못됐어요"라고 말하면 뻘줌했던 분위기가 살아났다고 한다.
당시 정ㆍ관계 있는 사람들은 "정치는 이후락, 경제는 김학렬"이라 꼽을 정도로 김학렬의 ’잘살아 보세‘ 경제개발 계획은 거침이 없었다.
강직했고 추진력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본과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중화학 공업의 불씨를 지펴 오늘날 경제성장의 밑돌을 놓았다. 김 전부총리는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주오(中央) 대를 나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2년뒤 미국으로 유학해 미주리 대학교 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나서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하며 경제개발 계획을 다듬었다.
1966년 재무부 장관을 지낸뒤 청와대 경제수석이 됐다. 경제관료가 특이하게도 정무수석까지 지내는 등 정무적인 감각도 있는 편이었다.1968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돼 70년대 고도성장의 밑그림을 그렸다.
김재익(1938~ 1983)은 80년에 등장한 신군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이 참에 관계를 떠날 생각이었다. 미국서 박사학위(스텐포드 대학)을 따고 귀국해 경제관료 생활을 시작한 관계로 고질적인 직업관료 틈바구니에서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마음을 비웠다. 한국개발연구원(KDI)으로 이직하는 새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당시 김원기 경제 부총리로부터 다급한 전갈을 받았다. 당대 신군부 실세인 전두환의 가정교사로 착출됐다. 그 때 사실상 국가통제기구인 국가보위상임위원회(국보위·상임위원장 전두환)로 출근했다. 또 새벽 5시 30분에 국보위에서 차를 보내면 연희동으로가서 매일 두시간씩 경제과외를 했다.
고단했고 때론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절대 권력'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이상적인 경제정책을 펴 볼 기회라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김재익은 수재였다. 경기고 2학년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합격했고 첫 직장인 한국은행도 수석을 합격했다. 그 때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미국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당시 경제 수리 시험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고 한다. 외모는 가름했지만 외유내강형이어서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는 능력은 대단했고 어떤 장애물도 돌파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창업동지‘인 허화평과 허삼수가 청와대에서 그의 이상적인 경제관을 타박해도 묵묵히 자신의 생각대로 전두환에 대한 ’경제 길들이‘에 성공했다. 물가안정이 왜 중요한지, 개방과 자율경제 체제가 자원이 없는 나라가 살 길이란 점을 명확하게 주입했다.
전두환은 권력장악의 토대를 쌓자 ’허화평과 허삼수‘에게는 오히려 부담을 느꼈다. 김재익 앞에 놓여 있던 차단벽이 스스로 허물어 졌다. 정통성이 없는 전두환정부가 그래도 경제에서는 점수를 얻은 것은 김재익이 쉼 없이 밀어붙인 물가안정 정책에 힘 입은바 컸다.
김학렬과 김재익. 보잘것 없었던 나라 경제를 살찌우는데 헌신한 경제관료였다. 김학렬은 자신이 펼친 경제정책마다 각을 세웠던 남덕우 서강대 교수를 1969년 재무장관으로 천거했다. 한국 경제 제2 도약 발판을 만들 인재를 모으는데 마음의 담장을 풀었다. 대학서 외교학을 전공한 김재익에게 경제를 왜 공부하려고 하냐고 그의 부인이 묻자 그는 “나라가 잘살고 봐야 외교도 할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등 해외에 머물던 두뇌들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정 전 장관은 “들어와 나라의 기술자립을 위해 힘 써 주게”라는 김재익 수석의 전화를 받고 목이 메었다고 한다.
둘은 세상을 크게 보고 자신의 쓰임새를 잘 알고 있었다.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고 주변의 따까운 시선도 달게 받았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김학렬은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몸을 돌보지 않고 업무를 추진하는 동안 자신의 병은 깊어가고 있었다. 당시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밤샘이 다반사였다. 박 대통령은 “쓰루는 내가 일을 많이 시켰고 나랑 통음을 하는 바람에 일찍 갔다”며 자탄했다고 한다. 김재익은 1983년 전두환의 동남아 순방 수행중 북한이 자행한 아웅산 테러에 희생됐다. 참으로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은 나라의 인재였고 자신을 불사른 공직자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 국궁진췌(鞠躬盡瘁)의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