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3 10:23 (금)
◇영화 속 경제사(5) '철의 여인'㊤ 대처의 등장
◇영화 속 경제사(5) '철의 여인'㊤ 대처의 등장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11.27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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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의'영국 복지병' 도지자1976년 IMF行
막대한 재정적자 불구"놀아도 실업수당"모럴 해저드 만연
주인공 메릴스트립, '대처보다 더 대처같은' 몰입연기 탁월

‘디어 헌터’(1978),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 ‘소피의 선택’(1982), ‘실크우드’(1983),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할리우드 스토리’(1990),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어댑테이션’(200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줄리 & 줄리아’(2009), ‘어거스트’(2014),‘숲속으로’(2015), ‘플로렌스’(2017), ‘더 포스트’(2018).

잔뜩 나열된 이 영화에 공통점 하나가 있다. 뭘까? 영화를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관심이 많거나 특별한 한 배우의 빅 팬이라면 어렵지 않게 눈치 챘을 수 있다. 그렇다. 모두 미국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 출연했던 영화들이다. 물론 모두 주연작은 아니다. <디어 헌터>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등은 초기 작품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어댑테이션>이나 <숲속으로> 등 명배우로 명성을 쌓은 한참 뒤에도 조연으로 출연한 작품이 있다. 참, 이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모두 메릴 스트립이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됐거나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메릴 스트립. 그는 정말 대단한 배우다. ‘연기의 신(神)’이라는 찬사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객관적 사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 후보로 무려 21회나 노미네이트된 세계 최고, 영화사 최고 반열의 여배우. 성악가가 되기 위해 열두 살 때부터 훈련을 받은 덕에 연기는 물론 노래와 춤 또한 전문 가수나 댄서 못지않은 배우. 그래서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2008)에서는 전문 뮤지컬 가수로 오해받을 만큼 빼어난 노래와 춤 실력을 뽐내다가 영화 <플로렌스>(2016)에서는 영화 속 관객도 영화 밖 관객도 모두를 황당하게 만드는 음치 역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 그리고 다시 2년 뒤 <맘마미아-2>(2018)로 다시 뮤지컬을 한 배우. ‘완벽한 배우’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스트립 연기의 ‘힘’은 단연 ‘메소드 연기법(Method Acting)’에서 솟아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러시아의 연출가 겸 배우 겸 연극이론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Konstantin Stanislavskii)가 창안한 이 연기법은 배우에게 배역에 완전히 몰입시켜 실물처럼 연기할 것을 요구한다.

미국에서는 엘리아 카잔(Elia Kazan) 감독에 의해 발전했고 이후 훌륭한 배우들이 나오면서 연기의 주류로 올라섰다. 도입 초기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나 제임스 딘(James Dean), 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ry Clift) 등을 시작으로 폴 뉴먼, 더스틴 호프만, 톰 행크스, 크리스천 베일로 이어지고 있다. 여배우로서는 제인 폰다와 마릴린 몬로, 그리고 이들을 이은 메릴 스트립이 단연 ‘당대 최고’로 꼽힌다.

이런 그가 영화 <철의 여인>에서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 역을 맡았다. 대처가 누구인가. 물러설 줄 모르는 강인한 리더십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그는 영국 역사 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여성 수상이며, 역사 상 가장 재임기간이 길었던 수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와의 전쟁까지 벌이며 자국의 영토 포클랜드를 되찾았고 무시무시한 테러조직과 공산주의와 맞서서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던 인물이다. 또 결코 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노조와 싸워 이겼고 인플레와 저효율, 고(高)실업으로 치료가 곤란해 보이던 ‘영국병’을 고친 정치 ‘의사(醫師)’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전설’의 여배우 메릴 스트립은 굴복할 줄 모르는 여성 정치인 마가렛 대처를 어떻게 그려낼까? 누구라도 관심을 갖게 되는 흥미진진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탁월했다.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은 물론 목소리와 악센트 등 말하는 스타일,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까지 똑같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진짜 대처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는 평을 넘어 “대처보다 더 대처같았다”는 평까지 나왔다.

이 같은 평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연기는 아무리 ‘연기의 달인’이라 해도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연기를 위한 그의 노력과 희생이 뒷받침돼 있었다. 그는 대처의 말투와 연설 장면을 무한 반복한 것은 물론 가발을 쓰고 치아와 코에 보철과 보형물을 삽입했다.

2012년 그는 이 영화로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1979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여우조연상, 1982년 <소피의 선택>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 30년 만의 일이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노력과 성과에 만족스러웠나 보다. “이 영화는 내가 배우라는 게 감사하게 느껴지는 몇 안 되는 영화”라는 말까지 했다.

이러니 스트립의 연기를 보겠다는 생각에 극장을 찾은 관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연기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쉽지 않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봐도 재미를 느끼고 역사를 배우는 영화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 영화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재미있다. 영화 <철의 여인>은 이를 훨씬 넘어선다. 그저 재미를 더 느끼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수준이 아니다.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역사적 배경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단언하건데, 끝까지 집중해 볼 수 없을 것이다. 심하면 졸 수도 있다. ‘연기의 신’의 연기를 보면서 말이다.

영화는 빠르게 주마간산 식으로 역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절반 이상의 분량이 한때 잘 나가던 정치인이었으나 지금은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일상을 담고 있다. 이 노인의 일상은 다른 평범한 노인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역사는 이 노(老) 정치인의 시각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치매에 걸렸다. 이미 죽은 남편과 함께 잠들고 함께 대화한다.

회상이 온전할 수 없다. 영화는 그의 기억을 쫓아가며 단편적으로 역사를 보여 준다. 이 영화에서 역사는 치매에 걸린 노인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기억의 ‘편린(片鱗)’일 뿐이다. 역사를 모르는 관객에게 그 편린을 이해하라는 것은 지나친 강요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90년대 초까지 50년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라 얘기하는 것이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역사적 배경’은 ‘유럽은 자본주의 경제의 원류’라는 점이다. 모두 알다시피 자본주의 체제의 출발점은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이후 자본주의는 수 백 년 역사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유지되며 발전해 왔다.

인간의 역사는 문제의 발생과 그 해결 과정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해 왔던 이 기간 동안의 역사도 마찬가지. 다양한 이론과 철학, 실험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개인의 이윤 추구형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결함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자의 삶은 더 이상이 없을 정도로 나락에 빠졌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던 것이 공산주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러시아 혁명을 겪으며 다양하고 결정적인 결함을 목도하게 됐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찾을 수 없으며 새로운 독재와 새로운 계급 형성, 그리고 심각한 저효율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럽이 지나친 이윤 추구형 자본주의와 국가 독재 공산주의와의 중간 어딘가로 수렴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정치ㆍ경제ㆍ사회 체제는 점차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통합돼 불리게 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대세’가 됐다.

사회민주주의 체제란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특성을 갖는다. 한 마디로 정의가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은 있다.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 ①강한 복지, ②강한 노조 그리고 ③기업 국유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이들 특성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①강한 복지

‘복지’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있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 중유럽 국가들이 그들이다.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미권 나라들도 부러움을 살만 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복지’ 하면 떠오르는 나라로 반드시 영국을 꼽았기 때문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너무나 잘 알려진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온 것이 한창 전쟁 중이던 1943년 11월이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에는 케인즈의 『완전고용에 관한 백서』를 기초로 완전고용의 목표를 밝혔고 종전 직후에는 무상교육과 국민보험계획이 입법화됐다. 이 같은 기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도 계속됐다. 영국은 국민에게 무료시술에 연금지급 보조, 실업수당은 물론 결혼ㆍ임신ㆍ아동ㆍ과부ㆍ장례 등 삶의 주기별로 각종 수당까지 책정한 세계 최강의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②강한 노조

영국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나라다. 그만큼 노조의 역사도 빨랐고 힘도 셌다. 영국 노동사에서 1900년은 매우 중요하다. 이 해 영국 노조는 독립노동당이나 페이비언협회, 사회민주연맹 정치 세력을 규합해 노동당을 창설했다. 노조는 조합 활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정치권력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쳤던 것이다.

이후 노동당은 1945년 7월 전후 첫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며 이후 보수당과 경쟁해 수차례 정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폈다. 노조의 세력 강화는 물론 사회복지도 강화시켰고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도 정책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 노조의 이 같은 강력한 힘은 1980년대까지 계속됐는데, 특히 1974년 탄광노조와 보수당 정권의 갈등은 노조의 힘을 느끼게 해준 유명한 일화였다. 노조는 이 대결에서 승리했고 보수당은 정권을 다시 노동당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보수당 당수이자 수상이었던 히스는 “누가 영국을 지배하는가” 외치며 노조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③기업 국유화

국가 차원의 대규모 기업 파산은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국가는 경영이 어려워진 기업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는 방식과 ▶지분투자를 통해 민관 혼합기업으로 만들거나 ▶아예 국가가 그 기업을 인수해 국유화시키는 방법이다.

20세기 전반 유럽은 1930년대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전쟁을 겪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을 많이 썼다. 위기 기업의 지분 일부 또는 전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특히 철도, 통신, 에너지, 금융 등 국가 기간산업에 소속된 기업은 국유화되는 경향이 컸다.

프랑스는 전후 공공서비스 성향이 있거나 독점 기업의 경우 공동체 소유로 한다는 내용을 헌법으로 명시했을 정도다. 영국의 기업 국유화는 1974년 노동당 집권 후가 특히 중요한데, 윌슨 2차 내각은 영국의 100대 기업 중 25개 기업을 공기업으로 만들고 나머지 사기업에도 투자나 고용 등을 국가가 통제하려 했다.

보수당 당수이자 68대 영국 수상을 맡았던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1970~74년까지 수상을 하며 노조, 특히 석탄노조와 극심한 대립을 보였다. 1974년 선거에서 석탄 광부들의 81%가 파업에 참가하리라는 예상에 국민은 노동당에 표를 줬고 그는 다시 ‘야당’의 자리로 내려왔다.
보수당 당수이자 68대 영국 수상을 맡았던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1970~74년까지 수상을 하며 노조, 특히 석탄노조와 극심한 대립을 보였다. 1974년 선거에서 석탄 광부들의 81%가 파업에 참가하리라는 예상에 국민은 노동당에 표를 줬고 그는 다시 ‘야당’의 자리로 내려왔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 같은 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이면에 공적 영역을 강조하던 케인즈 이론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 경제를 이끌며 세계를 호령하던 사적 영역 중심의 고전 경제학은 대공황과 전쟁을 겪으며 급속하게 케인즈 이론에 ‘주류’ 자리를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시장의 확장과 심각한 경쟁은 빈부격차를 키우고 결국 사회 전체를 위협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던 것이다. 케인즈는 그 대안을 정부의 ‘재정지출’로 제시했다. 고전주의 경제학은 늘 수요-공급의 균형을 주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시장의 실패’가 얼마든 있을 수 있으며 이때의 ‘시장 실패’는 결국 정부가 재정지출로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키우면 실업이 줄고 소비가 확산되며 산업이 활성화되는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복지를 위한 재정지출의 확대는 ‘악(惡)’이 아니라 ‘선(善)’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케인즈 이론을 채택한 영국의 재정적자는 확대일로를 걸었다. 전쟁 직후 GDP에서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였지만 1970년대에는 이 비율이 40%대로 늘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정적자 외에 사회민주주의 정책은 다양한 측면에서 비효율을 낳는다는 문제가 노출됐다. 복지의 발달로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은 줄고 놀고먹으려는 사람이 늘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언제든 실업수당을 줬다. 노조는 막강한 힘을 갖고 기업은 물론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장악하려 했다. 기업을 국유화하고 경제를 계획경제, 통제경제로 이끌어 가고자 했다. 때가 되면 임금을 올려달라 했고 새로운 복지를 요구했으며, 정치권력을 활용해 중요한 요구는 법제화시켰다.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파업을 했다.

기업은 기업대로 효율이 떨어졌다. 특별히 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혁신은 노조의 반발로 무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익을 내봐야 임금과 세금으로 빠져나갈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자본가와 기업에는 ‘노동자 착취’ 이미지가 고착됐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맞는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기업이 나올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같은 상황이니 거시경제 차원에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성장, 생산, 소비, 무역 등 대부분의 부문에서 심각한 문제가 터져 나왔으며 특히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국민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고. 1950년대와 60년대는 그럭저럭 넘겼다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었다. 1970년대 영국은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단 것이다.

1970년대 가장 피부로 와 닿은 것은 물가였다. 물가상승률은 1960년대 4%에서 70년대 중반 무려 20~30%까지 치솟았다.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유를 복지 등 사회민주주의 정책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냉전시대였던 만큼 엄청난 군사비 지출이 있었고 오일 쇼크에 따른 세계적인 물가상승도 한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10~20%대의 높은 임금인상과 엄청난 복지재정 지출이 물가상승의 압력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업 또한 심각했다. 앞서 말했던 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비효율이 주류를 이뤘다. 기업의 국유화와 통제, 강한 노조, 국가에서 주는 각종 수당으로 편하게 연명해 가려는 젊은이 등이 실업률 상승에 기여했다.

기업은 가급적 사람을 뽑지 않으려 했고 경영이 어려우면 감원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일보다 실업수당을 택하는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2%대로 유지되던 실업률은 70년대 중ㆍ후반 4%대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구직 포기자까지 합칠 경우 실질적인 실업률은 훨씬 올라갔을 것이다.

1970년대 또 하나의 문제로 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외환이었다. 물가상승과 실업의 증가, 성장 둔화, 경제 활력의 저하, 많은 세금, 수당으로 편히 먹고 살려는 분위기 등은 1970년대 중반 외환 부문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고 있으니 외국 자본이 그대로 있을 리 없었다.

1970년대 들어서자 해외자본 유출이 본격화됐고 당연히 환율이 올랐다. 정부는 환율 방어에 전력을 쏟았고 그 결과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났던 것이다. 1976년 영국은 선진국 중에서는 처음으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영국의 1970년대는 이처럼 어려웠다. 상상하기 쉽지 않겠지만, 요즘으로 치면, 그리스나 이탈리아, 또는 남미 경제를 연상시킬 정도다. 1970년대 영국은 고물가ㆍ고임금ㆍ고실업ㆍ저성장이라는 ‘병(病)’에 걸렸고 세상은 그 ‘병’을 ‘영국병’이라 불렀다. 1970년대 말이 되자 그 ‘영국병’은 급격히 그리고 더욱 악화됐고 결국 영국은 자리에 누워 잃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978년 말과 1979년 초 영국 국민은 이 병으로 인해 ‘불만의 겨울’을 보내야 했으며 영국은 이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의사와 처방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같은 필요에 부응할 적임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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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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