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3 14:05 (화)
◇김수종의 취재여록 ㉜ 페트로 국가 베네수엘라 (2) 가난한 '열대 농업국가'서 '석유부국'으로
◇김수종의 취재여록 ㉜ 페트로 국가 베네수엘라 (2) 가난한 '열대 농업국가'서 '석유부국'으로
  • 이코노텔링 김수종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6.02.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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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할 당시 '커피 국가' 또는 '코코아 국가'로 곧잘 불려
석유가 쏟아질 시점에 고메즈 장군이 1908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27년간 철권 통치
비록 문맹 가까웠지만 정치안정 도모하고 외국 투자유치 적극나서 유전개발 촉진해
석유 위에 세운 민주주의는 한 때 세계의 부러움을 샀지만 바로 그 석유로 체제 흔들
1935년 고메즈의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는 정치혼란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마침내 1945년 이른바 '28세대'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1922년 12월 14일 새벽,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호수 서쪽 라로사 마을의 어둠을 찢고 검은 분수가 하늘로 솟구쳤다.

영국계 석유회사 로열더치쉘의 석유 시추공에서 하루 10만 배럴의 원유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검은 황금'은 며칠간 분출되며 마을 땅을 기름으로 뒤덮었다. 베네수엘라의 국가 운명이 바뀌는 장면이었다.

▪︎검은 분수와 군인의 나라

시추를 성공시킨 사람은 로열더치쉘 소속 지질학자 조지 레이놀즈였다. 그는 이미 1908년 이란에서 중동지역 최초의 석유시추를 성공시킨 이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베네수엘라에는 여러 미국 회사 소속 지질학자들이 탐사에 나섰지만, 그들은 말라리아 등 열대병과 혹독한 더위에 치를 떨며 베네수엘라의 석유매장 가능성을 저평가하고 있었다. 반면 로열더치쉘은 자그마한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대들었고, 그 결과 오늘날 세계 최대 매장량을 자랑하는 마라카이보 분지의 석유자원을 터뜨린 것이다.

1829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베네수엘라는 커피, 코코아, 사탕수수나 재배하던 가난한 열대 농업국가였고, '커피 국가' 또는 '코코아 국가'로 곧잘 불렸다. 19세기 내내 권력은 군인들의 손에서 놀아났고, 쿠데타가 일상화된 나라였다. 1890년대 베네수엘라 국회의원 184명 중 112명이 장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는 기록은 당시 이 나라 정치 풍토를 잘 보여준다.

석유가 쏟아진 시점에서도 권력은 군부에 있었다. 후안 비센테 고메즈 장군은 1908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27년간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비록 문맹에 가까웠지만, 그는 외국인 투자유치에 눈독을 들였고 외국 석유회사에 혜택을 주며 유전 개발을 추진했는데 역설적이게도 독재에 의한 정치적 안정으로 유전개발이 촉진되었다. 1921년 연간 140만 배럴에 불과하던 생산량은 1929년 1억3,700만 배럴로 폭증하며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산유국이되었다. 그 혜택은 고메즈와 그의 일파에게 집중됐다.

▪︎민주주의 싹 28세대 등장

1935년 고메즈의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는 정치혼란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마침내 1945년 이른바 '28세대'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1928년 고메즈 체제에 반대데모를 벌이다 투옥되거나 망명했던 자유주의 지식인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일부 군부와 연대해 정부를 구성하면서 베네수엘라에 최초의 민주 체제를 수립했다.

이 민주정부의 핵심 인물이 대통령 로물로 베탕쿠르트였다. 그는 학생시절 고메즈 군부 정치와 독재에 반대하다 망명과 정치적 유배를 반복한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가 집권하게되자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법률가가 된 페레스 알폰소를 석유를 관장하는 자원부 장관에 앉혔다. 알폰소는 국가와 석유회사와의 수익 분배를 50:50으로 설정하는 원칙을 도입하는 등, 베네수엘라 석유정책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그는 훗날 국제 유가 카르텔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 OPEC(석유수출국기구) 창립의 산파역을 맡았다.

하지만 처음 등장한 베네수엘라 민주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7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완전한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은 이듬해인 1948년 11월 24일 군부 쿠데타로 전복됐다. 선출된 권력은 무너졌고, 군부 지도자들이 다시 실권을 잡았다.

베탕쿠르트는 미국과 인근 카리브해 국가들을 오가는 망명생활을 하며 반체활동을 했다. 알폰소 역시 정치적 공간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석유정책을 연구했다. 이 시기는 민주주의와 석유정책의 결합 가능성을 다시 진지하게 사유하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푸엔토피호 협약 — 다시 민주화의 길로

10년 가까이 지속된 군사독재는 석유 수익을 독재적 개발 프로젝트와 군사 권력 유지에 사용했고, 시민사회와 정당의 역량은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1958년 1월 베네수엘라 정치지형은 다시 요동쳤다. 시민과 정당세력, 그리고 일부 군부 내부의 변화 세력이 연합해 군부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때 베탕쿠르트가 망명 길에서 돌아와 민주주의 복원의 중심에 섰다.

1958년 10월 체결된 푸엔토피호 협약(Puntofijo Pact)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다. 이 협약은 주요 정치세력들이 모여 "선거 결과를 존중하고 군부독재가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문서였다. 이 협약은 이후 약 40년간 베네수엘라를 비교적 안정된 민주체제로 유지하게 한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베탕쿠르트는 푸엔토피호 협약의 설계자로서 "민주주의는 제도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알폰소를 불러들여 자원·석유장관에 기용하고 석유 수익과 국가 재정을 민주적 틀 안에서 조화시키는 방안을 찾도록 했다.

푸엔토피호 협약 이후 베네수엘라는 선거와 권력의 평화적 교체라는 민주주의 관행을 보이며, 석유 수익을 공공재정의 기반으로 활용해 나갔다.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았고 도전도 이어졌지만, 민주제와 석유 부국이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의 모델을 보여준 시기였다. 베탕쿠르트와 알폰소는 민주주의와 석유의 부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는 희망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베탕쿠르트와 알폰소의 퇴진

벤탕쿠르트와 알폰소는 푸엔토피호 민주 체제의 상징 인물이었다. 베탕쿠르트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초를 다졌고, 알폰소는 석유 정책의 방향을 잡았다. 둘은 각각의 자리에서 베네수엘라가 민주주의와 석유 부국을 동시에 가진 나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나 시대는 질서만으로 지속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세계 유가 변동성과 국내 재정 수요의 증가가 겹치면서 민주적 재정 운영은 점점 시험대에 올랐다. 베탕쿠르트는 1963년 임기를 마친 뒤 정계에서 물러났다. 알폰소 역시 1963년 장관직을 떠났다. 두 사람의 퇴진은 석유를 둘러싼 국가 운영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석유 수익은 여전히 국가 재정을 떠받쳤다. 그러나 이 질서는 영원하지 않았다. 절제가 요구되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과 석유 수익에 대한 정치권력의 욕구 사이에는 점점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간극은 결국 다음 시대의 도전, 즉 포퓰리즘과 체제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베네수엘라와 한국 1965년

1965년은 베네수엘라가 민주주의 체제와 석유 부국의 지위를 동시에 유지하던 시기였다. 당시 국제 비교 통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869달러에 달한 반면, 같은 해 한국은 약 109달러, 미국은 3,800달러 수준이었다. 이 수치는 한 국가가 얼마나 잘 사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다.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한국의 약 8배에 해당했으며, 미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았지만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상위권에 속하는 소득 수준을 기록하며, 자원과 제도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 한국은 산업화의 초입에 서 있던 가난한 나라였다. 두 나라는 한때 농업 기반의 사회였고, 외부 영향과 내적 갈등을 경험했으며, 군부정권 경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석유라는 자원과 비교적 안정된 민주적 제도를 세운 베네수엘라는 당시 세계가 주목하는 부유한 나라로 자리 잡았다.

▪︎포퓰리즘의 잉태

그러나 번영의 지표는 언제나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석유 수익에 의존한 경제 구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취약해졌고, 민주주의 제도 역시 풍부한 자원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선거는 유지됐지만 정치는 점차 석유 수입을 어떻게 나누느냐를 둘러싼 경쟁으로 변질되었고, 국가는 생산보다 분배에 익숙해져갔다. 눈에 보이지 않던 균열은 이 시기부터 서서히 쌓이기 시작했다.

훗날 베네수엘라를 뒤흔들 거대한 격변은 하루아침에 닥친 재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번영의 그늘 속에서 자라난 구조적 문제들이 임계점에 도달한 결과였다. 석유 위에 세운 민주주의는 한때 세계의 부러움을 샀지만, 바로 그 석유가 제도의 토대를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 이를 막아낼 기반은 단단하지 못했다.

석유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었던 짧은 순간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또한, 바로 이 시기 이후 베네수엘라가 겪게 될 역사적 변곡점들 속에서 다시 확인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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