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 시간 0~10세 가장 길어…'반복적 일상'은 압축해 빠르게 느껴져
#덧없다 세월이-. 낫살이나 든 이들이 흔히 쓰는 말이 '쏜 살' 같다는 표현이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인생을 좀 살다보면 문득 뒤 돌아보게 되고, 기어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고야 만다. 독백 같은 한탄인지, 한탄 같은 독백인지. 기분이 영 '쎄'하지만 찬찬히 두루 짚어보면 변한 게 너무 많고 나 홀로 벌판에 서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몰려오는 거부 불가한 무력감. 고장 난 벽시계는 하루 두 번은 제 값을 하는데, 나는...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나를 버린 사람보다 네가 더욱 야속하더라/한두 번 사랑 땜에 울고 났더니/저만큼 가버린 세월/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2절)
청춘아 너는 어찌 모른 척하고 있느냐/나를 버린 사람보다 네가 더욱 무정하더라/뜬구름 쫓아가다 돌아 봤더니/어느새 흘러간 청춘/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몇 년째 계속되는 트로트 열풍 속에서 나훈아(羅勳兒)의 '고장 난 벽시계' 의 인기가 꾸준한 것은 다 까닭이 있다. '가황(歌皇)'이란 칭송조차 부족할 정도의 가창력도 그렇지만 세월 밥을 좀 먹었다 싶은 이들한테는 누구라도 제 얘기인양 노랫말이 절절히도 가슴을 저미는 때문이다.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매화타령'하는 신세라니-.차라리 저 벽시계처럼 고장이라도 좀 나지 이 '웬수' 같은 세월아, 세월아!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지면 그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게도 '연세'가 드신 게다. 언제 이 나이가 됐나 싶은데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것 같고, 허무하기만 한 게 허송세월(虛送歲月)한 것 같아 민망하고 속상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 같은 허무는 세월의 속도를 자각(혹은 착각?)하는 데서 출발해서 무섭게 자라는 탓에 더욱 비감(悲感)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이자 속성이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는 건 당신 혼자가 아니라고 과학은 말한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폴 자네(Paul Zane)는 심리적 시간이 연령에 반비례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를 '자네의 법칙(Zane's Law)'라고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 '대수 비례 함수(Logarithmic Proportionality)'라고 하는 것으로 시간의 인식 변화를 수학적으로 설명한다. 10세 어린이에게 1년은 인생의 10분의 1에 해당하지만 50세 성인에게 1년은 인생의 50분의 1에 불과한데, 이처럼 살아온 인생 전체에서 차지하는 시간 단위의 비율이 줄어들수록 같은 1년이라도 심리적으로는 더 짧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1세 아이가 체감하는 1년을 365일이라고 했을 때 같은 1년이 10세는 36.5일, 20세는 18.3일, 40세는 9.1일로 줄어든다. 이 법칙에 따르면 50세의 1년은 체감 일주일(7.3일), 80대를 넘어가면 4.6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열 살짜리 손주의 한 달이 여든 할아버지한테는 불과 나흘처럼 느껴지니 얼마나 '쏜 살' 같겠는가? 그래서 과학계에선 이 법칙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직관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시간의 인식 변화는 신경계의 노화로도 설명된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경험이나 강렬한 감정을 동반한 사건을 '기억의 랜드마크'로 저장해 시간을 늘이는 효과를 주는 반면에 예측 가능한 '반복적 일상'은 압축 저장돼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신체의 노화가 진행되면 시각, 청각 등 감각기관에서 들어온 정보를 뇌가 인지하고 처리하는 신경망의 속도가 둔화된다. 즉 자극의 입력 속도는 똑같은데 이를 처리하는 기관인 뇌의 처리 속도는 점점 느려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단위 시간당 뇌에 각인되는 새로운 이미지나 정보의 양이 젊을 때보다 줄어들게 된다. 어린이가 1초에 60프레임짜리 영화를 보는 것이라면, 노인은 1초에 30~40프레임짜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인지하는 정보의 밀도가 낮아진다는 것이다. 뇌에 기록되는 정보가 적을수록, 돌아봤을 때 시간은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체감 시간 속도의 가속'은 특히 40~50세 사이에 가장 극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대체로 50세가 되면 "10년이 1년처럼 흘러갔다"는 말을 종종 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인간의 2차 노화 가속기가 이 무렵이므로 관련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다 우리의 뇌는 아주 묘한 놈이어서 익숙하고 반복되는 정보를 효율성을 위해 압축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자극이나 놀라운 사건이 줄어들고 매일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 뇌는 그 경험을 개별적인 기억이 아닌 하나의 뭉뚱그려진 기억으로 저장하게 되고, 이에 따라 기억이 단순화될수록 회상할 때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쾌감과 보상, 새로운 학습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변화가 시간 인식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설명도 있다. 도파민은 스무 살 전후로 최고치를 찍고 나면 이후 10년마다 약 5~10%씩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도파민 분비가 줄어들면 뇌의 신경회로에 기록되는 기억의 강도가 약해진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고 인상 깊은 사건이 적어지면서 되돌아봤을 때 한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과 함께 상대적으로 시간이 짧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직업을 갖고 안정된 일상 패턴을 유지하게 되면서 삶은 예측 가능성으로 채워진다.
한편 인간의 체감 시간이 가장 긴 시절은 0~10세까지의 아동기라고 추측된다. 이 생애 첫 10년간의 체감 길이는 나머지 인생의 전부, 즉 10세부터 사망 시까지의 전체 기간의 체감 길이에 맞먹는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미 2024년 12월 초(超)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전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20%이상이면 초(超)고령사회인데 2024년 1025만 6782명에서 지난해엔 1084만822명으로 58만4040명이 늘어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21.21%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가뜩이나 '빨리빨리'에 정신 못 차리는 우리나라가 더욱 '시간조급증'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느긋이 머리를 써야할 젊은이들은 점점 주는데다 그나마 '오포족(五抛族: 취업·결혼·연애·출산·내 집 마련 포기)'으로 가는 수가 늘어나고, 영양가 적은 늙은이들은 '라떼' 에 젖은 채 시간타령으로 부지세월이니.
#시간에서 속도의 변주가 느껴지면 허무가 찾아들고, 이어 인생이 무상해진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하나는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한탄 대신 즐김으로 극복하려는 태세 전환이다.
우선 '탈(脫) 시간'의 시도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존재를 꿈꾸는 것이니 신(神)과 같이 되겠다는 발상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 애쓰고, 도사(道師)들은 신선이 되기 위해 죽어라 연단술(鍊丹術)에 매달린다. 진시황뿐만 아니라 주나라 목왕(穆王), 한나라 무제(武帝), 또 진시황과 한무제의 어리석음을 탓했던 당태종(唐太宗)도 말년에는 단약(丹藥)에 빠져 자기 무덤을 팠다. 이처럼 불가(不可)한 것을 미치도록 간구(懇求)하다 보면 진짜 미쳐서 허상일망정 나름의 '초월상(超越像)'을 빚어낸다. 동서양이 따로 없다. 동박삭(東方朔)은 삼천갑자(三千甲子), 즉 18만 년을 살았고, 우리의 단군(檀君)할아버지도 1908살이나 사시다 신선이 되셨다. 성경 속 무드셀라(Methuselah)는 아담의 8세손이자 에녹의 아들이며 노아의 할아버지로서 969살까지 살았고, 히브리인과 아랍인, 에돔인의 공통된 조상이자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Abraham)과 그의 부인 사라(Sarah)도 각각 175살, 127살까지 살았다. 중국 장가계(張家界) 천문산(天門山)에 살았다는 삼황오제 때의 적송자(赤松子)와 춘추전국시대의 귀곡자(鬼谷子), 한나라를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유방(劉邦)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을 피해 이곳에 숨어 신선이 됐다는 장량(張良)도 그런 존재였다. 이런 이들을 동양에선 신선(神仙) 또는 선인(仙人)이라 했는데 이들은 원래 신(神)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노력을 통해 신의 경지에 오른 존재로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기원한 개념이다.
전국시대 말기(기원전 4~3세기경)부터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는 사상이 생겼고, 진·한대에 방사(方士)들이 불로초(不老草)·선약(仙藥)을 찾는 활동을 하면서 널리 퍼졌다. 4세기경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서 체계화돼 도교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됐다. 도교에 등장하는 신선들만 500여명이나 되는데 노자(老子), 황초평(黃初平),하마선인(蝦蟆仙人), 장지화(張志和) 등 남성 신선이 대부분이지만 서왕모(西王母), 마고선녀(麻姑仙女) 등 근엄하면서도 온화한 이미지의 여성 신선도 있다.
특히 신선도 등에 많이 등장하는 신선은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이철괴(李鐵拐),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 남채화(藍采和), 하선고(何仙姑) 등 여덟 명이다. 이들을 소재로 한 폭에 함께 그린 그림이 팔선도(八仙圖) 또는 군선도(群仙圖)이다. 각기 다른 시대에 활약한 이들이 '팔선(八仙)'이라는 개념으로 통합된 것은 중국 원나라 때이다.
#불사약을 탐하고 신선술에 탐닉한 건 권력자만이 아니었다. 술을 좋아해 '주선(酒仙)'이요 시를 기막히게 잘 썼다고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우리의 호프 당나라 이백(李白)도 그러했다. 이백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의 토크막(Tokmok)일대 수야브(碎葉城)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사천(蜀) 지방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이곳은 도교의 원조인 장도릉((張道陵)의 오두미교(五斗米敎)의 발상지로 도교 사원이 많고, 신선 숭배가 강한 지역이어서 그는 5세에 이미 '육갑(六甲)'을 외울 정도로 도교적 지식을 접했다. 또 10~20대 초반에는 동암자(東巖子) 같은 은사와 함께 민산(岷山)에 은거하며 도교를 수양했고, 스무 살 쯤엔 '장생부적(長生符籍)'인 '장생전(長生篆)'을 받는가 하면 사마승정(司馬承禎), 원단구(元丹丘), 자양선생(紫陽先生) 등 여러 도사(道士)들과 교류하며 신선 수련과 도술을 익혔다. 그는 촉 지방에서 나온 뒤 강릉(江陵) 에서 당시 최고의 유명 도사였던 '상청파(上淸派) 모산종(茅山宗)'의 12대 종사(宗師) 사마승정(司馬承禎)을 만나 그로부터 "선풍도골(仙風道骨)로 가히 신과 더불어 노닐 수 있는 팔극지표(可與神遊八極之表)"란 극찬을 들었다. 이에 이백은 스스로 '대붕부(大鵬賦)'를 쓰는 등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원단구(元丹丘)*, 원연(元演) 등 평생의 도우(道友)들과 '신선교(神仙交)'란 모임을 맺기도 했다. 이백은 그 뒤에도 태산, 왕옥산, 청성산 등 여러 명산을 순례하며 내단(內丹)·외단(外丹)을 수련하고 40대 중반인 천보(天寶) 34년경 (745년) 제주(齊州)에 있는 자극궁(紫極宮· 노자사당)에서 청기관피(靑綺冠帔) 입고 스승 고천사(高天師)**로부터 도교 최고 등급의 도록(道箓)인 '상청경록(上清經籙)'을 받아 상청파 최고 법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도사(道士)' 자격을 얻은 것으로 이백이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라 정식 도교 수행자가 된 결정적 순간으로 재앙을 피하고 신령의 보호를 받아 말세(末世)를 건너뛸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말년까지 수행을 실천했다. 특히 아내 종씨(宗氏)도 도교 신자로 부부가 함께 도를 닦았는데 안사(安史)의 난 뒤에도 계속 도관(道館)에 드나들었을 정도다. 그를 당 현종(玄宗)에게 추천한 오균(吳筠)도, 이백을 "하늘에서 쫓겨 귀양 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고 칭송한 하지장(賀知章)도 당시 유명한 도사들이었다. 이백의 시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 신선처럼 자유롭게 유람하고자 하는 염원이 강하게 드러나면서 호방표일(豪放飄逸)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 점에서 그는 도교 철학인 노장사상과 도교 신선 신앙을 결합한 가장 대표적인 문학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로 이백의 '장진주(將進酒)'에 나오는 '단구생(丹丘生)'이다.
**또는 고여귀(高如貴)
#신선이란 개념이 우리나라에는 기원을 전후한 때에 한문화와 함께 불교보다 먼저 유입된 것으로 학계에서 보고 있다. 고대에 역시 민속 신앙에 의한 설화적 · 신화적 사회 구조 아래 사상 · 문화 등 여러 제도가 형성돼 오다가 도교가 삼국으로 유입됐다.
고구려의 경우 영류왕 7년(624년)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도사(道士)와 함께 천존상(天尊像)과 도법을 보내 그 도사가 《도덕경(道德經)》을 강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미 중국의 남북조시대 때 도교, 특히 신선사상과 도가의 무위사상이 유입된 흔적이 있다. 백제도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375)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와의 싸움터에서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가(道家)의 글을 인용해 추격을 중지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있다. 이로써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국의 도교가 백제에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제34대 효성왕(孝成王) 2년, 당현종(唐玄宗)이 사신을 시켜 《도덕경(道德經)》과 여러 가지 문서를 보내 왔다는 사실이 있다. 이와 함께 6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 오회분(五盔墳) 4호묘 벽화에는 신선이 팔괘도(八卦圖)를 그리고 있는 장면이 있고, 강서대묘(江西大廟)에도 신선 벽화가 있으며, 백제시대에는 신선이 조각된 금동대향로와 같은 유적 및 유물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중국에서 수입된 개념이 아니라 고유 신앙과 상당 부분 융합돼 독자적인 전개 양상을 보였다. 삼국시대에는 민족 고유의 민간 신앙에 의한 산신사상(山神思想)·수신사상(水神思想)·무속신앙(巫俗信仰) 등 정령사상(精靈思想)인 자연숭배(自然崇拜) 신앙이 깊었고 이에 원류를 둔 도풍과 선파(仙派)가 존재했었다. 이에 따라 우리만의 독특하게 전개됐는데 신선이 되고자 하는 '득선(得仙)'보다는 신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도움을 받는 '우선(遇仙)' 설화가 많다. 또 산악신앙과 강하게 결합해 많은 명산에 신선봉, 선인봉 등 봉우리 이름과 영선동(瀛仙)등 신선 관련 전설·지명 남아 있고, 최치원, 김시습 등 신선이 됐다는 인물도 여럿 있다.
#인생 허무를 극복하는 또 다른 방식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기자는 주의이다. 어차피 얼마 못 가 종(終)치는 인생, '후회 없도록' 맘껏 놀아보자! 이 같은 생각은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던 고대사회에서 일찌감치 유행됐다. 춘추시대부터 양(梁)나라 때까지 작품을 모아놓은 《문선(文選)》에 실린 고시(古詩)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백 년을 못 누리는 생명이(生年不滿百)/ 늘 천년의 근심을 품는다.(常懷千歲憂)/낮은 짧고, 괴롭게 밤은 기니(晝短苦夜長)/어이 아니 촛불을 켜고 놀지 않으리오(何不秉燭遊)/즐기려면 바로 지금 할 일이지(爲樂當及時)/ 어이 내년을 기다린단 말인가?(何能待來玆)/바보는 비용을 아끼다가(愚者愛惜費)/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但爲後世嗤)/신선 된 왕자 교 같은 분과(仙人王子喬)/우리를 비교하는 건 택도 없음이다.(難可與等期)'
참, 기막히지 않는가. 그 옛날 누군지도 모르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네 심사를 그대로 옮긴 것 같으니 말이다. 세월은 흘러도 인간사는 고금동(古今同)이라더니-, 불안한 정세 속에 청담(淸談)사상이 유행했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주덕송'을 지은 유령(劉伶)이나 당나라 때 시인 이백 역시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특히 시선이란 별호 답게 이백은 그 유명한 '춘야도리원서(春夜桃李園序)'에서 앞에 든 '고시'에 맞장구를 친다.
'대저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요.(夫天地者萬物之逆旅)/세월이란 것은 백대의 지나가는 나그네라.(光陰者百代之過客)/뜬구름 같은 삶은 꿈과 같으니(而浮生若夢)/기뻐할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爲歡幾何)/옛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밤에 놀러다녔다는 게(古人秉燭夜遊)/진실로 까닭이 있었도다.(良有以也)(하략)'
이백과 비슷한 연배인 백거이(白居易)도 술을 마주하고서 외친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다투는가(蝸牛角上爭何事)/번쩍하는 부싯돌 불꽃같은 이 내 몸(石火光中寄此身)/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겨야 하리(隨富隨貧且歡樂)/크게 웃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바보일지니(不開口笑是痴人)'-'대주(對酒)' 이수(二首)
#우리나라에서 10대 소년, 20~30 대 청년, 40~50대 장년, 60 대 이상 노년으로 부르던 시절 잔치판이나 관광버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노래가 있었다. 바로 '노랫가락 차차차'이다. 김영일 작사, 김성근 작곡으로 1962년 황정자(黃貞子)*가 발표한 이 노래는 우리의 전통 고유(경기민요)의 '노랫가락'**과 서양음악 '차차차(cha cha cha)'***를 버무린 퓨전(fusion) 곡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 늙어지며는 못노나니 / 화무는 십일홍이요 / 달도 차며는 기우나니라 / 얼시구 절시구 차차차 /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 화란춘성 만화방창 /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 차차차 차차차.(1절)
가세 가세 산천 경개로 / 늙기나 전에 구경가세 / 인생은 일장의 춘몽 / 둥글둥글 살아나가자 / 얼시구 절시구 차차차 /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 춘풍화류 호시절에 /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 차차차 차차차.(2절)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아까운 청춘 늙어가니/춤추던 호랑나비도 낙화지면 아니 온다네/얼시구 절시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때는 좋다 벗님네야 /아니 노지는 못 하리라/차차차 차차차(3절)'
그 시절은 나날이 정말 고달팠다.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깐, 동족상잔의 전화(戰禍)가 휩쓸고 간 폐허에서 다시 삶을 일궈야 했던 민초들에겐 산다고 사는 게 아니었다. 자식들은 줄줄이 늘어섰는데 먹을 게 있나, 입을 게 있나. 구호물자에 기대도 보릿고개를 넘다보면 자식 한 둘은 '애총'으로 보내야 했던 시절이라 입에 풀칠이라도 할라치면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 했으니 오죽 고단했겠는가. 그렇다고 마냥 시절 탓만 할 수 없지 않겠나. 그래서 잠시라도 고됨을 벗어나 정신승리라도 할 양으로 불러 제친 노래가 바로 '노랫가락차차차'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니 하는 가사가 허무(虛無)로 가득하지만 이를 경쾌한 차차차 리듬으로 버무려 그냥 한바탕 신식 흥타령이 돼 지친 영혼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한국인 평균수명이 52세 전후****이던 시절이라 그런지 처음엔 아줌마·아저씨로 대칭(代稱)되는 40대 이상 장년층의 노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애어른 할 것 없이 엉덩춤과 함께 신바람으로 즐기는 인기 히트송이 돼 버렸다. 지금도 노는 자리에선 한두 번쯤 불리고 있으니 이 노래의 생명력도 놀랍거니와 그만큼이나 오늘날도 고단하다는 반증이라 씁쓸할 따름이다.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나 13살에 '살랑춘풍'으로 데뷔, '오동동타령' '처녀 뱃사공' 등 히트곡을 남기고 1969년 장암(腸癌)으로 타계했다.
**'노자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데/ 인생은 일장춘몽에/ 아니놀고 무엇하리(1절)'. 5절까지 있다.
***차차차(cha cha cha)'는 라틴아메리카(남부 아메리카) 댄스 장르 중의 하나다. 쿠바의 춤 곡 단손(danzon)이 개조되어 생겨난 것으로,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차차차 음악의 특징은 단음 또는 스타카토(staccato)의 지속, 박자는 일반적으로 4분의 4박자로 연주하며 4분의 2박자로 연주할 때도 있다.
****남성 52.1세, 여성 53.7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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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