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6 08:25 (화)
[김성희의 역사갈피] '법 앞의 평등'의 그림자들
[김성희의 역사갈피] '법 앞의 평등'의 그림자들
  • 김성희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5.12.15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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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세상에 대한 '약속'이면엔 '시민'이란 누구인지 등 부르주아 계급이 정해
'프랑스 대혁명' 속 한 구절 인용해 " '법 앞의 평등'은 기만적 언어 "라는 지적도
요즘 돌아가는 정치판을 보면 법 이전의 '원칙'이 권력 가진 이들 앞에 '힘' 못 써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귀족의 특권을 없애려 했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요즘 정치판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법'이라는 게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법 이전의 '원칙'이 권력을 가진 이들 앞에선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해서다.

여기에 "그는 X새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 X새끼다"라는 진영논리까지 판치니 사정은 더욱 악화할 수밖에.

한데 '법 앞의 평등'이란 원칙이 출발부터 한계 또는 함정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었다. 『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엄창호 지음, 루아크)란 인문학적 에세이집에서다. 여기 '달콤 쌉싸름한 특권의 맛'이란 글이 실렸는데, 프랑스혁명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알베르 소불의 저서 『프랑스 혁명사』, 『프랑스 대혁명』의 한 구절을 인용해 '법 앞의 평등'은 기만적 언어였다고 지적한다(그러니 내 글은 인용의 인용인 셈이다).

'법 앞의 평등'은 1789년 프랑스혁명의 결실인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세계사의 주요 명제로 떠올랐다. 이 선언의 제6조는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유명한 '법 앞의 평등'을 밝힌 규정이다.

한데 이를 두고 소불의 해석은 다르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귀족의 특권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인구의 97%를 차지하는 민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결국 민중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법 앞의 평등'이란 '선물'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기 위해 "능력, 덕성, 재능에 따른 차별 이외에는"이란 단서를 붙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인권선언 제1조의 "오직 공동의 유용성에 입각할 때만", 그리고 제13조의 "능력에 따라" 같은 구절에서 보듯 곳곳에 이런 '함정'이 숨어 있다.

평등한 세상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시민'이란 누구인지, '능력'이란 무엇인지는 부르주아 계급이 정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실제 인권선언 이후에도 투표권은 남성 유산계급에만 주어졌고, '인간'에서 여성은 배제되었다. 오죽하면 올랭프 드 구주가 「여성권선언문」을 썼을까.

당연히 선언이 발표된 직후부터 비판이 나왔다. 당시 부르주아를 대변했던 미라보 백작조차 이 제약 조건들이 자유를 속박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으며, 유력 신문 『파리의 혁명』의 편집인 엘리제 루스탈로도 "귀족정에 고용된 사람들이 인기의 가면을 쓰고 새로운 귀족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인권선언의 기만성을 지적했다.

자연법 사상과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인권선언'을 기초한 라파예트와 시에예스 모두 귀족 출신 남성이었다. 특히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부추기는 등 혁명 이념에 등을 돌리는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법 앞의 평등'은 애초 출발부터 이상에 불과했던 건지 모른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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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편집고문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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