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로 이민와 벼농사로 거부된 김종림이 큰 돈 내놔
비행기 사고 졸업생 배출하는 등 순항 하다가 주수입원인 벼농사 어려워져 폐교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에 공군 비행대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전세를 바꿀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조금은 엉뚱한 이 꿈을 실현하려 애썼던 이들이 있었다.
미국의 중부 캘리포니아의 한인 이민사를 다룬 『캘리포니아 디아스포라』(차만재 지음, 인물과사상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교장이었던 노백린(1875~1926)은 한일병탄으로 나라를 잃자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16년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 망명생활 중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자신을 군무총장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백린은 빼앗긴 나라를 싸워서 되찾겠다는 구상을 하고 미국에서 군대 양성 방안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차에 시카고의 한인 지도자였던 곽림대에게서 한인 백만장자인 김종림을 만나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함경남도 출신인 김종림은 1916년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왔는데, 이때는 캘리포니아에서 '백미왕(rice king)'이라 불릴 정도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로 식량 수요가 급증하면서 캘리포니아에선 아시아 노동자들을 활용한 쌀농사 붐이 일었던 덕분이었다.
임시정부에 활동 기금을 보내기도 했던 김종림은 노백린의 전투기 조종사 양성 계획을 듣고 흔쾌히 자금을 대기로 했다.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한인 비행학교를 세우고, 김종림이 비행기 구입과 교관 고용, 인건비 지급 등을 도맡고 노백린은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을 맡기로 한 것이다.
김종림은 2만 달러를 들여 비행장 부지 40에이커를 사들이고, 학교 운영비와 교관 급여 등에도 매달 3,000달러씩 쓰기로 했다. 이 금액은 지금 가치로도 막대하거니와 교민들의 대표적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비행학교에 지원한 금액이 월 600달러였으니 김종림이 비행학교에 얼마나 열성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김종림은 또 대당 3,000달러로 비행기 3대를 구입했다. 비행기 동체에는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이뤄진 태극 무늬와 KAC(Korean Aviation Corps·한국비행단)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그려졌다.
이렇게 해서 1920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인 비행학교가 문을 열었다. 미국인 유명 조종사 해피 브라이언트와 미국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은 바 있는 한창호 등이 교관을 맡았고, 학생은 19명이었다. 노백린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인의 비행 훈련은 일본과 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일제의 뜨거운 맛을 몰랐던 일부 미국 여론은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1920년 7월 우병옥 등 첫 졸업생 4명을 배출하고, 등록생이 두 배로 느는 등 학교는 순조롭게 운영되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인 비행학교는 2년을 채 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921년 상반기에 문을 닫아야 했다. 1920년 11월부터 캘리포니아에 한 달 이상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쌀농사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탓이었다. 유일하고도 최고의 재정 후원자였던 김종림 역시 대부분 재산을 잃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면서 비행학교는 동력을 잃었다. 이후 재개교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21년 4월 이후 한인 비행학교는 공식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노백린 장군은 기억해도, 김종림이란 이름은 모른다. 그야말로 역사의 갈피에 숨겨진 뜻있는 인사인 데도 말이다.
---------------------------------------------------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