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과잉생산'탓으로 나타나
화폐는 상품일까? 이것저것 조건이 붙겠지만 대부분 전문가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 받아들이자. 이번 시리즈의 주제는 '상품의 과잉생산'이다. 만일 '화폐=상품'으로 여긴다면 화폐도 과잉생산된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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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는 그야말로 신비한 존재다. 파도 파도 실체 파악이 어렵다. '상품'은 어떤가. 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화폐는 상품일까"라는 질문의 '신비성'은 최소 각각의 두 배에 이를 것이다. 답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 하지만 어쩌랴. 이미 던져진 질문인데. 어쨌거나 답을 내 보자. 이런 때는 쉽게 가는 게 좋다.
일단 '상품'부터 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사고파는 물품'으로 돼 있다. 그러니 '시장'의 존재 유무가 '상품' 규정에 중요한 변수일 것이다. 화폐는 어떤가? 다음에 답을 해 보자. ①물품인가? ②사고팔 수 있나? ③시장이 있나? 답은 모두 '예스(yes)'다. 따라서 우리는 '화폐=상품'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화폐'는 당연히 '상품'이다. 하지만 요즘 그 특성에 대한 논란이 심상치 않다. ①'종이돈'이다 보니 금ㆍ은처럼 사용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②금이나 은으로 바꿀 수 없는 '불환화폐(Fiat Currency)'에 ③기술의 발달로 실체가 없는 사이버 화폐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른 탓이다. 화폐의 실체성과 사용가치, 교환의 표준 등을 강조하던 기존의 '표준 상품 이론(the Standard Commodity Theory)'에 화폐의 일반 상품성을 강조하는 '순수 상품 이론(the Pure Commodity Theory)'이 센 도전장을 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어떤가? 역시 '화폐=상품'으로 본다. 하지만 일반 상품과는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강조한다. 첫째, 사회적으로, 모든 상품의 내재 가치를 드러내는 '일반 등가물로서의 상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둘째, 이윤 창출을 위해 자본가가 직접 동원하는 노동력이나 생산수단 등 '생산력'의 외부에서 이들을 지배하는 동시에 간접적으로 '이윤 창출을 돕는 상품'의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150년 된 이론이다. 이 역시 요즘 화폐의 성격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화폐의 상품성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 이외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또 하나의 논의가 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라는 경제학자가 주창한 것이다. 이 학자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테니 간단한 소개로 시작하자.
폴라니는 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나 20세기 초ㆍ중반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가리켜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창시자'라 부르며 따른다. 21세기 들어 사회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도 분명한 한계를 보이자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그의 이론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안'을 찾으려 한다.
1944년 출간된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ition)》이라는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는 '허구상품(Fictitious Commodities)'에 대해 말한다. 이는 수요-공급 논리에 의존하는, 흔히 시장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기조절능력(Self-regulation)'이 없는 상품을 가리킨다. 노동(Labor)과 토지(Land) 그리고 화폐(Money)가 폴라니가 제시하는 대표적인 '허구상품'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이들 세 가지는 사고파는 '상품'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돼서도 안 된다. '노동'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곧 인간성 말살을 의미하며 '토지'의 경우 자연이 갖는 내재적 가치가 무시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연 파괴라는 극단적 길을 간다. '화폐'가 상품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폴라니는 무분별한 투기 활동과 그로 인한 금융 시스템의 파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 여기까지 정리하고 다시 질문을 생각해 보자. 화폐는 상품인가? 앞서 말한 세 학파의 답은 모두 '예스(yes)'다. 물론 모든 논의는 각자가 주창하는 거대한 이론적 맥락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그 특성을 몇 줄로 뚝딱 정리하려는 것은 과하다. 하지만 모두 '화폐=상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맞다. '특수한 성격'을 강조하기는 해도 결국 '화폐=상품'이라는 것이다.
이 시리즈 글은 '상품의 과잉생산'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화폐'도 '상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화폐로서의 상품'도 과잉생산되는 것일까? 당연하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과잉생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과잉'의 정도가 크면 인플레이션의 정도도 커진다. 그만큼 화폐 가치도 떨어진다.
화폐를 과잉 상태로 많이 생산하면서 인플레이션과 화폐 가치 하락의 정도를 줄이는 방법은 있을까? 있다! 그게 뭘까? 그리고 과거에 그런 방법을 쓴 적도 있을까? 이 역시 있다! 1970년대 중반 구축된 '페트로달러 체제(Petrodollar System)'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의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도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야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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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