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9억6천만 달러와 토지 4,400만 에이커(남한의 약 두배의 크기)를 배당 받아
이 재산은 개인에게 나눠 준 것이 아니라 원주민 거주지 12곳의 법인에게 맡겨져
석유배당 들어오는 날엔 현금이 눈 처럼 쌓여 술에 취한 젋은이들 거리에 수두룩
토착 언어 소멸,알코올 의존,'기후 변화로 인한 강제 이주' 등은 풀어야 할 부작용

"에스키모는 땅부자다."
알래스카를 취재할 때 유난히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스키모'는 북극권에 사는 모든 원주민을 뭉뚱그려 부르는 표현입니다.
사실 에스키모라는 단어는 외부인이 붙인 이름입니다. "날것을 먹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어원을 가졌다는 설도 있어 당사자들은 사용을 꺼립니다. 알래스카에는 북부의 이누피아트(Inupiat), 남서부의 유픽(Yup'ik), 알류트(Aleut), 내륙쪽의 아사바스칸(Athabascan) 등 여러 민족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들을 통칭해 '알래스카 원주민'이라 부르겠습니다.
1867년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였을 때, 거의 모든 미국인은 이곳을 "눈과 얼음뿐인 황무지"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보호 대상'으로 분류했지만 정작 시민권은 주지 않았습니다. 본토 인디언들이 겪었던 대량 학살이나 강제 이주가 덜했던 것은 백인 개척자들이 북극의 혹독한 기후를 감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후가 곧 방어막이었습니다.
▪석유 앞에서 열린 협상 테이블
상황이 뒤바뀐 것은 20세기 중반입니다. 알래스카의 전략적 가치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확인되고,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쏠렸습니다. 그러던 1968년, 북극해 연안 프루도베이(Prudhoe Bay)에서 초대형 유전이 발견됩니다. 석유 수송 파이프라인 건설이 추진되자 원주민들은 "그 땅은 우리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땅값이 올라가니 역사적 권리가 현실의 협상 카드가 되었습니다.
결국 1971년, 미국 정부는 '알래스카 원주민 청구권법'(ANCSA)을 제정하며 대규모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현금 9억6천만 달러와 '토지 4,400만 에이커(약 17만8천㎢)'가 제공되었습니다. 이는 알래스카 전체 면적 약 171만8천㎢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다만 이 재산은 개인에게 나눠준 것이 아니라 원주민 거주지역을 기준으로 12개의 지역별 주식회사를 설립해 법인 형태로 맡겼습니다.
그때 주주 자격을 얻은 원주민은 약 8만 명. 결과만 보면 8만 명이 남한의 거의 두배에 이르는 큰 땅을 나눠 가진 셈이니 땅부자라는 말이 근거 없는 농담은 아닙니다. 특히 유전이 위치한 북부 지역을 담당한 ASRC(Arctic Slope Regional Corporation)는 이후 석유, 건설, 항공 물류, 보안 서비스까지 진출하며 2022년 기준 자산 55억 달러, 고용인원 1만5천 명을 기록해 미국 500대 기업 수준까지 올라섰습니다.
ANCSA 시행과 함께 알래스카 원주민 전원은 자동으로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알래스카는 연방 편입 100여 년 만에 비로소 완전한 미국이 되었습니다.
▪깃발 위에 새긴 존재 증명
원주민이 미국 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낸 첫 사례는 의외로 깃발에서 시작됐습니다. 1927년, 당시 알래스카는 아직 미국의 '준주(Territory)'였고, 지역 의회가 공식 깃발 디자인 공모를 열었습니다. 13세 소년 벤니 벤슨(Benny Benson)이 여기에 당선됩니다. 알류트와 러시아계 혼혈이던 그는 짙은 푸른색 바탕에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배치해 '밤하늘과 희망'을 상징했습니다. 이 깃발은 1959년 알래스카가 미국의 49번째 주가 된 이후에도 그대로 주기(State Flag)로 채택되었습니다. 원주민 소년의 시선이 알래스카 전체의 상징이 된 셈입니다.
ANCSA 지역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는 기묘한 풍경도 벌어졌습니다. 막대한 토지와 배당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자, 일부 백인들이 "나도 할머니 쪽에 원주민 피가 있다"며 주주 등록을 요청했습니다. 눈이 파란 백인이 인디언이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자본과 탐욕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였습니다. 결국 '원주민 혈통 최소 25%'라는 기준이 설정되었고, 주식은 외부인에게 팔 수 없으며 혈통을 가진 자에게만 상속되고 배당이 돌아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공동체 정체성을 보존하는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 돈은 들어왔지만 삶은 복잡해졌다
1980년대 중반, 알래스카 원주민 마을에서는 석유 배당이 들어오는 날이면 현금이 눈처럼 쌓였습니다. 동시에 마을 술집 앞에는 알코올에 취한 청년들이 눈길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허다했습니다. 사냥과 협동 노동에 기초한 전통 질서가 빠르게 약해졌고, 도시로 나온 젊은 세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방황했습니다. 급기야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ANCSA는 에스키모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려는 연방정부의 음모"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돈이 항상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알래스카는 진짜로 부자가 되었을까
2025년 현재, 알래스카 원주민 혈통을 가진 사람은 약 15만 명, 이 가운데 ANCSA 기업의 정식 주주로 등록된 인구는 8만~10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오늘날 앵커리지에서는 원주민 출신 정치인, 변호사, 기업가, 교수가 등장하고 있으며, 원주민 법인은 석유 외에도 건설·항공·관광·광물 개발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연간 매출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 주체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토착 언어 소멸, 자살률과 알코올 의존, 기후 변화로 인한 강제 이주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땅은 넓어졌지만, 그 땅 위에서 어떤 삶을 구성할 것인지는 아직도 고민이 필요합니다.
"에스키모는 땅부자"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것입니다. 부유해진 그 땅 위에서, 그들은 이제 어떤 미래를 선택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