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떠밀려 '반란의 무리'의 앞에 서야만 했던 인물이 어찌 김장손 뿐일까

김장손 하면, 어지간히 한국사에 밝은 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일 터다. 그가 이끌었다는 임오군란 자체가 '민'이 아닌 '군'이 주체였고, 대원군을 지지한 보수 반동적 성격의 실패한 반란이기에 한국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탓이 크다.
한데 『가도 가도 왕십리』(김창희 지음, 푸른역사)에는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책은 공동묘지와 채소밭, 온갖 오물이 들어찼던 왕십리 지역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을 다뤘다. 여기에 왕십리 신촌(현 서울 성동구 응봉동)에 살았던 김장손이 어쩔 수 없이 반군의 리더가 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1882년 음력 6월 5일 무위영 하급 병사였던 그의 아들 김춘영이 옥에 갇혔다. 13개월이나 밀렸던 월급 중 한 달 치를 받으려 아침 일찍 선혜청 도봉소(창고)로 갔다가 당한 횡액이었다. 막상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인 데다 그마저 양이 부족한 데 항의하던 병사들이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했다. 당시 권세가 떠르르했던 민씨 척족의 핵심 인물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지시로 주동자 4명이 수감되었는데 춘영이 그중 한 명이었다. 이른바 '선혜청 도봉소 사건'이다.
6월 7일 함께 갇힌 유복만의 아우 유춘만이 김장손을 찾아왔다. 갇힌 병사들의 구명을 위해 이웃 왕십리 사람들의 뜻을 모아 탄원서를 올리려는데 글을 아는 김장손이 장두(狀頭·소장의 앞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가 되어 글을 써 달라 청했다.
권력을 거슬리다 투옥된 젊은이들을 구하는 것은 그저 호소로 될 일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했다. 김장손의 나이 예순셋,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한 그는 "살아도 내가 책임지고, 죽어도 내가 책임진다"며 기꺼이 나섰다. 이후 일은 급물살을 탔다. 왕십리 일대로 김장손이 작성한 통문이 나는 듯이 돌았고, 6월 9일 김장손은 수많은 군사들과 그 가족들과 함께 동별영으로 몰려가 무위대장 이경하에게 탄원서를 전달하고 석방을 호소했지만 이경하는 민겸호에 호소하라 책임을 돌렸고, 안국동 민겸호 집으로 간 군중은 그가 집에 없자 집기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임오군란의 '무력행사'의 시작이었다.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들은 운현궁으로 흥선대원군을 찾아갔고, 옥에 갇혔던 4명은 민중의 손에 풀려났고, 이들 군사들이 푸대접받는 계기가 된 신식 군대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과 민겸호 등이 성난 민중의 손에 맞아 죽었고,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몰려간 민중의 분노에 놀라 피신했고….
하지만 '반란'은 비극으로 끝났다.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한 달여 기세를 올렸지만 청군이 7월 15일과 16일 임오군란의 진원지이자 군병들의 집단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했다. 주민들은 돌을 던지고 조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결국 170여 명의 주민과 군사들이 잡혀가는 등 왕십리는 초토화되면서 '반역의 장소'로 낙인찍혔다. 경기도 양주 조운리로 도망갔던 김장손은 7월 27일 잡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김장손 이야기를 읽다 보면 손에 땀이 나기도 하지만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혁명가가 아니었고, 혁명을 일으키려 한 적도 없던 평범한 노인이 그저 아들을 구하기 위해 탄원서를 썼다가 '반란의 우두머리'가 되고 마는 이야기여서다. 상황에 떠밀려 무리의 앞에 서야 했던 혹은 서야 하는 인물이 김장손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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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