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게 만든 '조강시멘트' 개발해 공사 단축

여기에서 정 회장의 아이디어가 다시 번뜩인다.
일본에서 폐차된 중장비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다. 일본도 올림픽은 처음이었고, 57년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이후부터 경기장과 숙박시설을 짓고, 도로를 만드느라 많은 중장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올림픽 폐막 후에는 폐차한 중장비가 많았다.
"사용하지도 못하는 폐차를 왜 수입하느냐"라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고쳐서 쓰면 돼"였다. 그게 정주영의 주특기였다.
헐값에 중장비를 사더라도 수입 관세라는 장벽이 있었다. 그것도 한 방에 해결했다.
"폐차 수입이니 관세를 해결해달라."

이때 정 회장은 800만 달러를 투입해 일본에서 무려 1,900대의 폐 중장비를 사들였다. 국내에 있던 중장비 전체를 합쳐봐야 1,400대 정도였던 시절이다. 800만 달러는 당시 환율(300원)로 24억 원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전체가 430억 원이었으니까 정 회장의 베팅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수리한 중장비는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신이 난 정 회장은 직원들을 독려하며 순조롭게 공사를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옥천 구간의 당제 터널 공사 중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인부 세 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였다.
이후에도 낙반 사고는 계속 이어졌고, 인부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도저히 공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하루에 1m 정도 뚫으면 잘하는 거였다. 이 구간에만 600대의 중장비를 투입했으나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완공 기한을 맞출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의 독촉과 성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정 회장도 오기가 생겨 매일 당제 터널 현장으로 출근했다. 조바심이 난 건설부 장관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현장에 와서 둘러볼 정도였다.
비상 상황에서 내린 정 회장의 결단은 '조강 시멘트'였다. 속도를 중요시하는 정 회장의 지시로 현대 시멘트가 개발한 것으로 철 가루를 넣어 보통 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게 만든 시멘트였다. 조강 시멘트는 당시 단양 공장에서만 생산했는데 이걸 사용키로 한 것이다. 조강 시멘트를 단양에서 당제 터널 현장까지 매일 200km를 실어날랐다. 단가나 운임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착공한 지 2년 5개월 만이었다. 당초 공사 기간 3년도 모자란다고 했는데 그걸 7개월이나 줄여버렸다.
현대건설이 맡은 구간은 전체의 40% 정도였지만, 어쨌든 박정희와 정주영이라는 지독한 사람들의 합작품이라는 평가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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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