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더위 해소 도구가 아닌 사회적 신분, 정치적 상징, 예술품으로까지 인식
비밀스런 연애 감정이 담긴 '부채를 활용한 언어'(Fan Language)도 널리 유행
여름철 부채 든 사람 좀처럼 찾기 어려워…뱅뱅도는 '손풍기'엔 왠지 쓸쓸함이

극한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여름, 많은 사람들이 자동으로 바람을 뿜어내는 '손 선풍기'를 찾았겠지만, 여름철 소품 하면 역시 직접 손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였다.
인류 역사상 부채는 기원전(BC) 20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등장했다. 중국에서도 기원전 1100년경 사람들이 만들어 사용했다. 오늘날의 '부채'다운 접이식 부채가 등장한 것은 중국 진(秦, 기원전 9세기~기원전 207년)과 송(宋, 960~1279년)나라 사이로 전해진다.
부채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중세 르네상스(14~16세기) 시대였다. 십자군전쟁과 교역을 통해 아랍과 중국에서 부채가 전파됐다. 17세기~18세기 프랑스·영국·이탈리아에서 접이식 부채가 귀족 여성의 필수품으로 정착한 데 이어 19세기에 화려한 '부채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이 무렵의 부채는 단순한 더위 해소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신분, 패션, 정치적 상징, 그리고 예술품으로 인식되며 산업의 일부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스 루이 14세(1638~1715년) 황제 시절의 부채는 상아, 자개, 레이스, 금박 등을 사용하고, 크기와 부채면의 그림으로 귀족 여성의 세련된 품격과 부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덕분에 부채의 장식은 점점 화려해지고, 많은 기능들이 부가되었다.

그 무렵 흥미로운 것은 '부채를 활용한 언어(Fan Language)'였다. 여성들이 암호 같은 신호를 개발해 부채를 통해 주고받았다. 사회적으로 제한된 환경에서 부채를 통한 비밀스러운 감정 표현은 널리 유행했다. 특히 '부채 언어'는 연애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부채를 오른손에 들고 얼굴을 가리면 "당신을 좋아해요", 부채로 입을 가리면 "비밀이 있어요", 부채를 천천히 접으면 "곧 만나요"라는 뜻으로 통했다. 부채가 비밀스런 커뮤니케이션 도구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맞춰 루이 14세는 왕실이 인증하는 '부채 장인'('Maître éventailliste du Roi')을 임명했다. 부채 장인들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 금박, 상아, 레이스 등 고급 재료로 제작했고, 이는 곧 귀족의 신분을 더욱 고고하게 만들어주었다. 나아가 루이 15세 시절에는 국왕이 '부채 공방'을 조직할 정도로 부채 제작은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알렉산드르(Alexandre, 1827~1893), 뒤벨로이(Duvelleroy, 나폴레옹 3세 황후 외제니의 공식 부채 제작자, 1827~현재) 같은 고급 부채 공방들이 등장해 파리의 부채산업을 이끌었다. 이들 공방은 상아 등의 고급 뼈대와 실크로 된 부채면에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그려 넣어 부채를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부채 언어 외에도 부채 안에 비밀 메시지를 숨겨 넣기도 하고, 접히는 안쪽에 '연애편지'를 써서 보냄으로써 부채는 '연애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18~19세기 유럽에서 부채는 이동식 캔버스 역할도 했다. 이밖에도 신화, 궁정 생활, 정치적 풍자 등이 부채에 그려졌다. 나폴레옹 전쟁과 왕가의 결혼 같은 역사적 사건도 종종 묘사됐다. 이처럼 부채는 소통 도구이자 미디어, 명함, 작품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채 전성기에 만들어진 프랑스 왕실의 부채는 오늘날까지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1786년 무렵 제작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채가 달라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궁정 헌정품으로 제작되어 왕비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한다. 벨기에 왕비(Queen Louise)가 1839년 12월 파리에서 구입해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에게 선물했는데, 영국 왕실 소장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1839년 당시 가격은 20파운드로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2,400파운드(약 412만원) 수준이다. 그런데 '휴대 가능한 회화 예술'로 인식되며 비슷한 왕실 부채가 경매장에서 2억~10억원대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 사교장에서 '언어 없는 대화'의 수단이자 패션 액세서리였고, 예술적 공예품이기도 했던 부채는 17세기~19세기 중반까지를 정점으로 1890년~1910년대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사교문화(무도회·살롱 문화 쇠퇴)가 바뀌고, 여성복 스타일이 보다 간소화되고, 더구나 냉방 기술, 교통 등이 발달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사교용 부채'의 기능이 거의 사라지고, 민속·기념품·예술품으로 남게 되었다.
유럽에서의 부채 유행은 일본·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도 원래 전통 부채가 있었는데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서양식 부채를 받아들였다. 이 부채가 상류 여성 사이에서 유행했다. 일본 장인들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 서양 부채를 모방하고 개량하여 만든 고급 접이부채를 대량 수출하면서 부채 제작업을 '수출 공예품'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부채가 존재했다. 전통 부채(접히지 않고 평평한 판 형태의 방부채, 합죽선 등)가 중심이었고, 서양식 접이부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들어왔다. 1900년대 초, 경성·인천 등에서 서양식 장식 부채가 판매되었고, 신여성과 상류층 여성들이 사용했다.
1960~70년대 유럽식 접이부채는 고급 액세서리·선물용품으로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여성용 패션 액세서리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당시 부채는 여름철 필수품으로 세련된 장식품 역할을 했다. 해외 출장자나 선교사, 외교관 등을 통해 들어오거나 백화점 수입품 코너에서 구입하는 희소한 고급품이었다.
단순히 더위 피하기 용품이 아니라, 세련된 이미지와 교양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레이스, 자수, 프린팅 등 장식이 풍부했다. 유럽에서 직수입한 것일수록 고급 소재와 정교한 공예품으로 가치가 높았다.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부채는 여전히 '사치품·교양품'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유럽에서 이미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음에도 부채의 아름다움이 예술품 같은 향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린 올여름 폭염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에 드는 바람'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리에서 부채를 손에 들고 부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예술품은 아니지만, 버튼 하나로 강한 바람을 내뿜는 손 선풍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편리함 앞에서 부채는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손 선풍기 바람은 시원하다. 그러나 그 바람에는 이야기도, 낭만도 없다. 한때 신분과 사랑, 예술을 담아내던 부채가 우리네 일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