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만 그럴듯했고 사이토 통치기는 '3·1 민족대표'포섭 등 "정탐과 모략의 시대"
지방에서 갓 올라온 기생들을 끌어들여 '친일 기생'으로 만들어 스파이로 활용해

사이토 마코토란 이름을 들으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는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을 떠올린다면 한국 근대사를 설핏 기억한다 할 수 있고, 나아가 '3·1 만세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했던 인물임을 기억한다면 국사 교육을 꽤나 충실히 받았다 할 수 있겠다.
한데 헌병경찰제 폐지, 조선인 관리 임용, 동아·조선 등 민족지 창간의 물꼬를 틔워준 언론 집회, 출판 자유의 확대 등을 골자로 한 '문화통치'는 순수하게 일제 식민당국의 호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우선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어 1919년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한 사이토를 처음 맞이한 것은 강우규 의사의 폭탄이었다. 그로서는 '조센징'의 분노를 실감할 수 있는 '환영' 인사였을 테니 이전까지의 무자비한 탄압정치의 한계를 실감했으리라.
게다가 사이토 총독 자체가 튀는 인물이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1945년 패망 때까지 10명의 한국 통감·조선 총독을 임명했는데 육군대장 출신 일색이었던 여느 통감·총독과 달리 그만 유일하게 해군대장 출신이었다. 그의 임명 자체가 "무단정치의 실패를 비교적 온화한 해군 출신으로 완화하려는" 일본 정계의 계산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1919년 9월 10일 시정 방침 발표 이후 나온 "…총칼로 지배하려는 것은 그 순간의 효과밖에 없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과 종교와 교육 그리고 문화를 앞장 세워서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이 땅의 어린이들을 일본인으로 교육하겠다. 황은(皇恩)에 감읍하도록…그들을 세뇌시켜야 한다. 이것이 나의 문화정책이다"란 사이토의 발언에 '문화정치'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에 따라 사이토 통치기를 "정탐과 모략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3·1운동 민족대표에 대한 포섭 공작과 화류계 친일화 공작을 들 수 있다. 민족대표 포섭 공작은 최남선과 최린의 변절이 대표적으로 꼽히지만 여기서는 기생들에 대한 회유, 활용 사례를 소개한다.
당시 조선 엘리트들의 주요 사교·담론의 장은 요정이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고무된 기생들 중에는 뜻있는 이들이 많아 대학생이 요정에 오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독립할 생각은 않고 유흥이냐고 타이르거나 가난한 학생에게는 학자금까지 주며 독립투사가 되도록 설득하기도 했단다. 그러니 일제가 이들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경성에선 대정·한정·한남·형화권번 등 4개 기생조합에 800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여기에 대동권번이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지방에서 갓 올라온 기생들을 끌어들여 친일 기생으로 만들어 스파이로 활용했다. 이런 작업은 경기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 사토루(千葉了)가 지휘했는데 그는 "1919년 우리가 처음 경성에 왔을 때 당시의 화류계는…모두 살아있는 독립 격문(檄文)이었다"며 꾸준한 공작의 결과 "음모의 소굴이나 다름없던 화류계가 지금은 내선일여(內鮮一如)를 구가하는 봄날의 꽃동산이 되었다"고 자부했다.
이 같은 '치적'으로 사이토 마코토는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하며, 도합 10년 넘도록 이 땅에서 군주 아닌 '군주' 노릇을 했다. 소위 '문화통치'의 달디단 열매를 맛본 것이었다. 광복 절을 맞아, 일제 통감·총독의 행적을 파헤친 『인물로 본 일제 조선지배 40년』(정일성 지음, 지식산업사)을 들춰보다가 접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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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