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빙 떠다니는데 속도는 줄이지 않고 관찰하는 항해사 배치 않아
산업현장 또는 대형 사고에 대한 책임 규명보다 원인 규명이 중요

1912년 4월 15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던 타이태닉호가 북대서양상에서 빙하와 충돌했다.
그 충격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롭던 배가 160분 만에 침몰하면서 1,500여 명이 숨졌다. 그야말로 '세기의 참사'였다.
한데 『위대한 패배자』(볼프 슈나이더 지음, 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이는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의 책임이 가장 큰 '인재(人災)'였다.(물론, 지은이는 스미스 선장은 '비참한 패배자'로 분류했다.)
스미스 선장은 37년 동안 선장 생활을 해오긴 했지만 당초 이 호화유람선의 선장을 맡아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타이태닉 침몰 불과 반년 전에 그가 키를 잡고 있던 타이태닉호의 자매선 올림픽호가 영국 순양함 호크호와 해상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주 화이트 스타 라인 사는 그에게 타이태닉호의 첫 항해를 맡겼다.
스미스 선장은 출항 전 이미 치명적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배에 영국 군함에는 필수였던 탐조등을 설치하지 않았고, 망원경을 갖춘 망대(望臺) 설치도 등한시했다. 그 때문에 한밤중에 다가오는 거대한 빙하를 뒤늦게서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항해 중에는 뱃머리에 선원을 세우고, 선교 양측에 항해사를 한 사람씩 배치해서 어둠 속의 바다를 관찰하도록 해야 하는 지침도 지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치명적 실수는, 북대서양상의 가장 짧은 항로를 시속 22노트의 최고 속도로 운항했다는 사실이다. 4월이면 그 바다에는 거대한 유빙(流氷)이 떠다닐 때고, 이미 사고 전 14시간 동안 다른 배들로부터 유빙에 대한 경고를 다섯 차례나 받았음에도 그처럼 위험천만한 항해를 지시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항로를 대서양 남쪽으로 바꾸거나 속도를 줄였어야 했음데도 말이다. 배에 동승했던 화이트 스타 라인사 창업주의 아들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4월 20일로 예정된 유럽 귀환 예정 시간을 맞추라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승객과 화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선장으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배가 빙하와 충돌한 뒤에도 스미스 선장의 실수는 이어졌다. 즉각 SOS를 친 게 아니라 일등 선실로 달려가 상류층 승객들에게 격식을 갖춰 상황을 설명하느라 11분 뒤에야 무전실로 갔다. 다섯 번째 실수다.
마지막 실수는 인명 피해를 더 키웠다. 구명보트 조작에는 신참 선원들을 배치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다. 이 때문에 구명정 투하가 늦어져 20척의 구명정 중 두 척은 마지막까지 타이태닉호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게다가 "여성과 아이들만 좌현으로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기사도적 조치였지만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여성들은 자기들끼리 어둡고 차가운 바다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고, 남성들은 탈래야 탈 수 없었다. 그 결과 첫 구명정에는 65명 정원에 28명만, 두 번째 구명정에는 37명밖에 타지 않는 등 그나마 있던 구명정은 제구실을 못했다. 결국 구명정의 정원인 1,178에 훨씬 못 미치는 711명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산업현장 또는 폭우 지역에서 대형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엄벌과 책임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비극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선 급한 것은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사고 예방의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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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