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가 '하얀 금'에 혈안…설탕의 중심지 브라질에 아프리카인 노예들 북적
흑인노예 하면,미국 남부 목화농장 떠올리지만 실상은 그에앞서 사탕수수 농장 있어

얼마 전 코카콜라가 기존의 옥수수 시럽 대신 사탕수수 설탕이 들어간 신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라 해서 화제가 됐다.
이런 콜라 레시피 변경이 콜라광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압박'에 의해 성사된 듯 보도되는 바람에 더욱 세계인의 이목이 쏠렸다. 이를 계기로 설탕에 얽힌 세계사를 다룬 『설탕, 세계를 바꾸다』(마크 애론슨 외 지음, 검둥소)란 묵은 책을 뒤적였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가 유럽인에게 처음 알려진 때는 기원전 4세기 무렵이란다.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를 향해 동진하던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는 기원전 326년 인더스강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10년에 걸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귀향을 원했기 때문이다. 대신 알렉산더 대왕은 네아르쿠스 사령관을 시켜 뱃길을 따라 인도 해안을 탐험하도록 했는데 이 부대가 '달콤한 갈대'를 발견했다. 바로 사탕수수였다.
뉴기니가 원산지인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은 고대 인도에서는 종교 의례의 공물로 쓰였다. 이때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설탕 한 조각'을 '칸다(khanda)'라 불렀는데 이것이 아랍어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캔디(candy·사탕)'으로 되었단다.
어쨌거나 설탕이 오늘날 설탕으로 불리게 된 것은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 준디 샤푸르의 학자들 덕분이다. 사산 제국이 이란 지역에 세웠던 준디 샤푸르는 529년 기독교도들이 이단인 아테네 학교를 폐쇄하면서 그리스의 학자들이 이주하면서 당시 근동 지역의 최고 학문 중심지였다. 600년대 이곳 학자들이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새 방법을 창안하면서 '샤르카라(sharkara)'란 약물을 소개했는데 이를 페르시아인들은 '샤케르(shaker)'라 불렀고 이것이 곧 슈거(sugar)의 기원이다.
이후 단맛을 내는 설탕은 유럽에서 천연 벌꿀을 대체하면서 '하얀 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연히 사탕수수 재배는 돈이 되는 사업이었지만 이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적절한 경작지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사탕수수는 잘라내면 속이 곧 굳어지기에 24시간 내에 가열하여 정제하기 위해선 고된 노동이 필요했다. 이 대목에서 세계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 중남미 사탕수수 농장과 노예무역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기 위해 출항하면서 가져간 사탕수수는 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발전할 만큼 성공적이 사업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아즈텍인들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스페인은 설탕 사업에서 일찌감치 손을 뗐지만 영국, 프랑스가 속속 '하얀 금'을 캐기 위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1500년 향신료를 구매하기 위해 나섰던 포르투갈의 페드로 카브랄이 이끄는 선박이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브라질이 설탕 중심지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이후 400여 년 동안 300여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이 브라질에 노예로 끌려왔다.
우리는 흑인 노예하면, 미국 남부의 목화농장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그에 앞서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설탕이 없었다면 브라질이 없었을 것이고, 노예가 없었다면 설탕이 없었을 것이고, 앙골라가 없었다면 노예가 없었을 것이다"란 속설이 나왔을까.
설탕의 달콤한 맛에 흑인 노예들의 땀과 눈물이 깃들었다는 것이 불편한 역사의 진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맛이야 어떻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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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