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9 10:30 (토)
[이만훈의 세상만사] ⑱ 감자 애환의 역사
[이만훈의 세상만사] ⑱ 감자 애환의 역사
  • 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 webmaster@econotelling.com
  • 승인 2025.07.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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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작가" 인류 자유와 행복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중한 선물 "이라고 극찬해
1824년 산삼 쫓아 조선에 온 청나라사람들이 식량으로 감자 심은 게 첫 감자 도입시점으로 간주
최남선ㆍ이광수와 ' 조선의 3대 천재 '로 꼽힌 홍명희,소설 '임꺽정'에 '없던 '감자' 기술하는 실수
감자는 재배기간이 짧으면서도 단위면적당 총생산량이 많고 다양한 영양성분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등골에 땀이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탓인가 선풍기를 끼고 앉아 하릴없이 뒹굴다 문득 떠오른 단어 '감자'-. 해마다 이맘때면 겪는 회상의 의식(儀式)이건만 올해는 더욱 짙은 애상(哀想)으로 다가오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보리는 먼저 죽고 감자는 나중에 태어난다. 여름을 견디는 집마다 한소끔 김이 올라오면 감자 냄새가 곧 희망이었다.'

어디선가 본 '감자예찬'의 한 대목처럼 절절한 것은 식량이 부족했던 1950~70년대를 거치면서 찌는 듯 한 여름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 험한 보릿고개를 함께 넘었던 친구이자 뭇 생명을 지켜준 은혜로운 존재에 대한 예의일 테다. 18세기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메르시에(Luis Sebastien Mercier·1740~1814)가 일찍이 감자를 두고 "인류의 자유와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수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중한 선물"이라고 극찬했다지만 이 땅에서도 나를 포한한 수많은 이들이 절대 공감하는 '소울 푸드(soul food)'인 건 분명하다. 쌀이건 보리건 식량이 절대 부족하던 시절엔 감자 두어 개를 쪄서 밥 대신 먹었고 어쩌다 쌀이나 보리쌀이 한 줌 생길라치면 감자를 한 바가지 넣어 밥을 지었으니 '감자밥'인지 '밥감자'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

# 감자란 놈은 참 묘하다. 평생을 두고 그렇게 먹어댔건만 아직도 입이 궁금하면 찾으니 말이다. 젖 떼고 나서부터일 테니 강산이 일곱 번 바뀌는 동안에도 입맛은 여전하고, 외려 요즘에는 더 뻔질나게 그리운 건 나도 모를 일이다. 밥이야 단군 이래 유전자 물림으로 으레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습관'이니 그렇다 쳐도 감자에 이리 쏠리는 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애착 아니면 집착? 아니다. 이쯤 되면 중독 치고도 지독시리 고운 중독이다. 하마 나만 그런 가 했더니 다른 이들도 감자에 중독된 채 추억을 뒤적거리는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다. 어떤 시인은 어디를 가다 감자 삶는 냄새가 풍겨오자 코를 벌름거리며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라더니 이내 감자중독자임을 실토하고야 만다.

'어릴 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는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이라고.

#해가 그믈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늘 분주하게 대문턱을 수십 번은 넘나들며 종종걸음을 치곤했다. 제 키와 맞먹는 싸리비로 마당을 빗질하듯 깔끔하게 쓸어낸 다음 큰 멍석을 서너 장 깔고 손님들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하니까. 멍석은 남녀 간 내외를 하느라 가운데 사이를 두고 동서로 갈라서 깔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한 귀퉁이를 잡아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서너 군데에 물것들을 쫓기 위한 모깃불을 피우는데, 잘 마른 보릿짚으로 불쏘시개를 삼고 그 위에 낮에 미리 베어 새들새들하게 반쯤 말려둔 쑥 다발을 올리면 쑥 향이 사방으로 진동하면서 모기는 커니와 귀신조차 범접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윽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면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나고 반딧불과 경쟁하듯 짙은 어둠속에 껌뻑껌뻑 담뱃불과 함께 남정네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리에 앉는다. 안식구들은 저녁 설거지를 하느라 시간차를 두고 어린 것들을 업고, 끌고 와 맞은편 멍석에 앉고, 조금 큰 사내아이들은 워낙 번잡을 떨기 때문에 따로 한 멍석을 차지하고 장난질을 쳐대곤 했다. 우리 동네만 10여 가구였는데 거의 죄다 모여들었고 때론 이웃 마을과 건너 마을에서도 말을 오는 통에 여름저녁 우리 마당은 늘 남녀노소 반백명이 모이는 공회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비가 오시는 날이 아니면 한여름 동안 늘 저녁마다 치르는 행사라 어린 마음에 짜증이 날 법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하는 게 재미있어 힘든 줄 모르고 깡총대며 심부름을 하곤 했다. 얼추 모였다 싶으면 우리 형제들은 엄니가 때맞춰 삶아낸 감자를 채반이나 목판에 나눠 담아 멍석마다 눈대중으로 머릿수에 맞게 가져다 놓았다.

칠석날엔 밀전병도 나오고 어쩌다 한 번씩 강낭콩 박은 보리개떡도 특식(?)으로 제공할 때도 있지만 옥수수가 나오는 7월 중순까지는 오직 찐감자가 이른 밤참을 책임졌다. 소작을 부쳐 먹고 근근이 사는 집에서도 양식 보탬을 위해 감자는 심기 때문에 이때는 너도 나도 감자 품앗이를 해와 우리 집 부담을 덜어줬다. 뙤약볕 속에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게 한여름 시골 일이라 죄다 피곤도 하련만 저녁마다 이렇게 모여드는 건 동네의 대소사나 품앗이 의논을 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나지오 연속극' 때문이었다. 그 땐 라디오를 '나지오'라고 했는데 사방동네를 통틀어 우리 집 것을 포함해 두 대밖에 없었을 정도로 '귀한 몸'이었다. 미제, 일제도 아닌 '락희금성(樂喜金星· LG 그룹의 전신)'의 '골드스타' 제(製) 소리통에서 나오는 '유스(뉴스)'가 세상소식이라니 놀랍기만 한 데다 그 좁아터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별의별 얘기 거리를 주고받는 연속극이 그렇게 기막힐 수가 없었기에 어른애 할 것 없이 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매 번 한창 재미있는 대목에서 끝나는 연속극은 진짜 사실 같아서 동네사람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감자를 내기에 앞서 '나지오'를 마당 한가운데 의자 위에 모셔놓고(?) 볼륨을 최대한 올려야 했다. '유스'시간에는 더러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다가도 연속극 차례가 오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일제히 조용해져서 찐 감자 껍질을 벗기는 소리조차 자갈길에 마차 지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도 주제가가 절로 나오는 '시계없는 대합실'(58년 KBS), '녹색의 문'(62년 KBS), '진도아리랑'(65년 KBS), '섬마을 선생님'(66년 KBS), '기러기 아빠 '(69년 TBC) 등 연속극은 찐감자와 '나지오'로 각인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다.

특히 '시계없는 대합실'은 주제가 가락과 가사가 익살맞고 재미있어 아주 어린 나이에 뜻도 모르면서도 입에 달고 다녔는데 그 때마다 어른들이 잘 한다며 박수를 쳐줘 우쭐했던 기억이 선하다.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엥헤이 엥헤야 엥헤이 엥헤야/…/ 우리가 놀며는 놀고 싶어 노나/ 비 쏟아지는 날이 공치는 날이고/ 비오는 날이면 님 보러 가고/ 달 밝은 밤이면 별 따러 간다/ 엥헤이 엥헤야 엥헤이 엥헤야…"

이 같은 연속극 말고도 성우의 "…해설랑은 애닲고도 애닲은 얘기였습니다 그려!"하는 클로징 멘트가 인상적이었던 주말프로 '전설따라 삼천리 '(65~83년 MBC)도 우리 '마당 공연'의 최애 프로 가운데 하나였는데 특히 여름이면 어김없이 납량특집을 편성해 우리 마을 사람들의 오금이란 오금은 죄다 쥐락펴락, 저릿저릿하게 만들곤 했었다. 한참 뒤 TV시대가 열리면서 한동안 히트를 쳤던 라이벌 방송사의 '전설의 고향'(77~89년 KBS)도 찐감자가 빠져서 그랬는지 '나지오'의 원조 감흥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감자의 본향은 페루, 칠레, 볼리비아의 안데스 고원지대로 원주민들이 약 7000여 년 전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미에서 황금을 찾던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1500년대 중후반(1536년?) 유럽으로 전해져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1650년 중국에 도입됐고, 이어 1823~1832년 무렵 중국 만주에서 함경북도 지역으로 전래됐다. 이것이 우리나라 감자의 북방전래설인데 이밖에 1832년 영국 상선(Lord Amherst호)가 조선에 통상요구를 위해 충남 보령 앞 고대도(古代島)에 들렀는데 동승하고 있던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Charles Gutzlaff)가 주민들에게 씨감자를 나눠주며 재배법을 가르쳤다는 남방전래설도 있다.

순조실록 27년(1827년)3월11일자 기사에 따르면 순조 24년(1824)경 산삼을 찾으러 조선에 숨어 들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비상식량을 위해 몰래 산간지역에 심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오늘날 공식적으로 이 해를 감자의 첫 도입 시기로 삼고 있다.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1800년 대 초에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감자가 청나라로부터 강을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순조 28~29년 흉년이 들었는데 감자를 많이 심어둔 덕분에 굶어 죽는 것을 면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실려 있다.

이 땅에선 오랫동안 의약용이나 식용으로 마, 토란, 도라지, 인삼, 더덕, 칡뿌리 등 뿌리 식물을 이용해왔던 터라 도입초기 '악마의 채소'라며 저주했던 유럽과는 달리 감자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서 함경도 등 한반도 북방 지역과 강원도 산간까지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남부 지방의 경우에는 이미 고구마가 널리 보급되어 있어 감자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아 보급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자는 토양이나 비료에 구애받지 않고, 가뭄과 장마에도 강해 보급이 매우 빨라서 60년 일찍 전래된 고구마의 보급률을 능가하면서 나라 전역에서 흉년 구제에 많이 기여했다. 특히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일랜드의 상황과 비슷하게 일제 강점기 주식인 쌀이 수탈됨으로써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 서민들의 식생활의 중심은 감자가 고구마와 더불어 대용식으로서 자리 잡게 됐다.

감자가 우리나라 전역에 보급 재배되기 시작한 건 1900년 이후 품질이 개선된 외래종이 도입되면서부터. 1894년생이신 우리 할머니께서 열아홉에 포천서 우리 동네(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로 시집오시니 감자농사가 있더란 말씀을 생전에 하셨던 걸 보면 꽤나 빠르게 퍼져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감자가 전래된 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전국으로 퍼져 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만큼 소중하고 친숙한 작물이 된 것이다. 오죽하면 일제 때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꼽히던 벽초(碧草) 홍명희(洪命憙·1888~1968)선생이 1928년 그 유명한 소설 『임꺽정』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임꺽정 시대에 감자를 등장시키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주인공 임꺽정이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그곳 주민의 집에서 삶은 감자를 대접받는 얘기가 나오는데 임꺽정은 조선 명종(1534~67)때 실존했던 인물이니 감자의 전래를 실제보다 300년 가까이 앞당긴 셈이다. 소설가 이전에 석학이자 유명 언론인이던 그가 역사 소설의 생명인 '철저한 고증'에 누구보다 고수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런 실수가 당시에 이미 감자가 민초들의 '일상'이었음을 증명하는 예가 아닐까.

#쉬운 음식이 사람을 살린다. 그저 익히기만 하면 되고, 호불호가 적어 어디에 누구한테라도 환영받을 식재료이면서, 담백하니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법이고, 실제로 살렸으니 그게 바로 감자다. 주식으로, 반찬으로, 간식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감자다. 알이 굵은 놈은 굵은 대로 통째로 쪄서 먹고, 감자볶음, 감자국, 감자밥을 해먹고 잔챙이는 고놈들만 따로 모아 졸임을 하면 간간짭쪼름하니 졸깃한 맛이 더할 나위없다. 또 생으로 강판에 갈아 반죽할 필요도 없이 걸쭉한 채로 솥뚜껑에 들기름을 두른 뒤 부쳐 내거나 매콤한 고추를 걀죽걀죽 썰어 고명삼아 지져내면 정말 셋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 수밖에 없는 맛이다. 감자는 썩어도 죽지 않고 녹말을 남긴다. 캘 때 생채기난 놈들은 그저 큰 항아리에 담아두고 기다리면 곯다가 썩지만 나중에 찌꺼기를 걸러 앙금을 말리면 녹말가루가 되는데 이놈으로 감자떡도 하고 옹심이나 국수도 만들면 구수하면서도 쫄깃하니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뿐만 아니나 얼어버린 놈으로도 별미를 빚을 수 있는 게 감자다. 언 감자를 따듯한 물에 넣어 해동하면 껍질이 뭉그러지듯이 쉽게 벗겨지는데 이를 으깨 국수나 떡, 만두 등을 만들어 먹는다. 함경도 등 한반도 북부의 산간지방과 중국동포가 많이 사는 연변 등에서 지금도 향토음식으로 남아 있다.

고작 키우는데 석 달을 들여 일 년 내내 두고두고 이렇게 살뜰하게 우리를 지켜준 먹거리가 또 있을까. 그래서 어떤 이는 엄마가 나를 낳았지만 여름엔 감자가 나를 키웠다고 하지 않는가.

#감자는 먹을 게 변변찮던 시절 일체 가공 없는 생짜로도 꼬맹이들한테는 훌륭한 주전부리이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선 대부분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때라 그렇잖아도 보릿고개를 즈음해선 웬만한 풀때기는 물론 송기(松肌·소나무 속껍질)로 허기를 채우는가 하면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지레 뽑아 불에 그슬려 풋바심해 먹을 판이니 감자는 그야말로 때맞춰 하늘이 보내준 '만나(mana)'나 마찬가지였다. 감자는 꽃이 피면 곧 땅속에 알이 들어선다는 건 촌놈들의 '생이지지(生而知之)'라 누구네 밭이건 상관없이 꽃이 시든 포기를 골라 감자서리를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주인 몰래 슬쩍하는 것이지만 감자서리에도 금도가 있어 한 포기에서 한두 알씩만 캐되 먹을 만큼 이상은 절대로 손대지 않는 게 법이었으니 고작 두 포기에 서너 알이면 충분했다. 캐는 데에도 요령이 있어서 한 손으로 감자 포기를 잡고 다른 손으론 가장자리부터 안으로 둘레 파기를 해 감자알이 드러나면 조심스레 떼어낸 다음 다시 흙으로 메워 감쪽같이 원상 복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그 포기에서도 계속 알이 달리는데 농사를 그르치지 않게 하려는 지혜이자 농투산이 자식들의 내림 농심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점잖게 슬쩍한 감자는 아직까지 미처 다 여물지 못한 풋감자로 알도 그리 굵지 않지만 껍질이 얇고 바짓가랑이에 대충 쓱싹한 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아삭 셔언~한 즙이 입 안 가득 차오르는 게 잘 익은 신고배를 찜쪄먹을 상쾌한 맛이었다. 하지만 껍질이 진한 자주색인 자주감자는 흰감자보다 살이 단단하고 물기도 적어 상큼한 맛이 떨어지는데다 혀가 지릿할 정도로 제법 아린 탓(*껍질 등에 있는 솔라닌이란 독성 물질 때문이란 걸 그땐 알지 못 했다!)에 뒤늦게 잘못 캔 걸 알고 후회하지만 차마 버릴 수 없어 우그적 우그적 다 먹어치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자주꽃이 피면 자주감자인 줄 번연히 알건만 서리를 하느라 허둥대다 보면 이 같은 해프닝은 종종 일어나곤 했으니…,미독(微毒)은 약(藥)이라고, 그 때의 실수(?)가 보약을 몇 첩 먹은 턱은 됐을 테다.

#정부는 지난해 감자전래 200주년을 맞아 6월 21일을 '감자의 날'로 지정 선포하고, 우리나라 감자의 역사와 씨감자 등 연구개발 업적을 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쌀, 밀, 옥수수와 함께 4대 식량작물로 전 세계 150여 국가에서 재배하는 감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국제식량농업기구(FAO) 등의 제안으로 제정된 '세계 감자의 날(World Potato Day)'은 5월 30일 이지만 절기상 우리나라 봄감자의 수확철인 하지(夏至)에 맞춰 독자적으로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감자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건 1961년부터다. 6.25 이후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1898~1959) 박사의 주도로 감자를 연구하고 생산할 수 있는 기관인 '고령지시험장'을 설립한 게 시작이다. 대관령에 들어선 '고령지시험장'을 중심으로 씨감자 개발이 60여 년간 이뤄져 각종 환경에 잘 적응하는 감자 품종을 40여 가지 만들어냈다. 이 가운데 바이러스 감염이 잘 안 되는 무병 품종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세계 최초로 수경재배에 의한 씨감자 생산기술을 실용화해 알제리, 베트남, 파키스탄 등 개발도상국은 물론 감자의 고향인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에도 기술지원을 하고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씨감자를 수입하거나, 수경 재배 기술을 도입한 나라는 에콰도르를 포함해 20여 곳.

한편 이 같은 연구개발 노력으로 국내 감자의 생산은 1950년대 ha당 5t 안팎에서 최근엔 봄재배는 ha당 26t, 고랭지 여름재배는 ha당 33 t으로 크게 증가했다.

앞으로는 감자를 이용해 화장품이라든가 잘 썩는 플라스틱 개발 등 K감자 산업에도 기대를 걸만 하다.

#감자는 재배기간이 짧으면서도 단위면적당 총생산량이 많고 다양한 영양성분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매력덩어리다. 오늘날 감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생산된다. 어디서나 잘 자라고 다른 품종에 비해 비교적 손이 덜 가기 때문에 작은 텃밭에까지 재배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 감자는 1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수확하므로 1년 내내 싱싱한 감자를 먹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감자재배면적은 2.2만 ha로 평난지 봄재배(67%)가 가장 많고, 고랭지 여름재배 16%, 평난지 가을재배 10%, 겨울시설재배 7% 순이다. 연간 생산량은 70만 t으로 강원특별자치도 33%, 제주도 22%를 차지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강원도의 별칭으로 불려오다 나중엔 강원도 사람한테까지 확대 사용된 '감자바우'란 말이 근거가 있음이다.

사실 강원지역이 '감자의 땅'이 된 데는 역사가 있다. 1920년경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해발 650m 고원지대에 일본사람이 운영하던 2만 ha 규모의 기계영농을 하는 난곡농장(蘭谷農場)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일하던 독일인이 난곡 1·2·3호라는 신품종을 개발해 1930년대 강원도 지역에 대규모로 재배한 데서 비롯됐다. 이 농장에는 독일인이 5명 있었는데 이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청도에서 일본에 의해 잡힌 5000명의 독일인 포로에 속했던 사람들로 독일인답게 기계를 다루는데 익숙하고 감자 재배에도 일가견 있었다. 강원도 북부에 위치한 회양은 한양에서 출발해 철원, 평강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가는 길목의 교통 요충지여서 신품종 감자의 보급로 역할을 했다. 당시 강원도에는 화전민이 5만 명으로 도내 인구(약 150만 명)의 23에 달했는데 지형과 기후 여건상 쌀이나 보리농사가 어려운 곳에 살던 주민들이 기후가 감자재배에 적당한데다 다른 작물에 비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에 화전민을 중심으로 감자가 주식용으로 재배되었던 것이다. 1930년경엔 일본 홋카이도를 통해 '남작(男爵· Irish Cobbler)'이란 신품종을 들여와 보급해 많이 재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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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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