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에 끌려 갔다 몸 값 내고 돌아온 ' 환향녀 ', 훗날 서방질하는 여자 대명사 돼
세종"처녀 숨기거나 못생긴 아이 대신 내놓는 자는 처벌하라"며 언급해 기막혀

한국사를 뒤적이다 보면 안타까운 사연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약소국이 강대국에 상납하던 미혼여성을 가리키는 공녀(貢女)가 그중 하나다.
고려 때는 원나라에, 조선시대에는 명·청에 공녀를 보냈으니 끌려간 여성들의 애환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 입에선 '이게 나라냐'란 한탄이 나왔을 법한 이야기다.
끌려간 여성들 중 원나라 혜종의 황후가 되었던 기황후의 일족은 호사를 누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병자호란 때 후금에 끌려갔다 몸값을 내고 돌아온 '환향녀'들은, 돌아와서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으니 훗날 서방질을 하는 여자를 지칭하는 비속어 '화냥년'의 기원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조선시대 여성 52명의 삶을 뒤져낸 『또 하나의 조선』(이숙인 지음, 한겨레출판)에는 세종 때 공녀로 차출되었던 한계란(1410~1483)의 기구한 삶이 담겨 있다. 태종·세종 연간에만 114명의 공녀가 중국으로 보내졌으니 어쩌면 당시로선 그 자체는 그닥 별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다만 한계란의 사연은,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는 사실 말고도 좀 특별하다.
이미 9년 전 그녀의 언니가 공녀로 보내져, 명 영락제의 여비(麗妃)가 되었다가 황제가 세상을 떴을 때 함께 순장되었으니 그녀의 심사가 어땠을까. 누나를 중국 황제에게 진헌하여 황친(皇親)의 특혜를 누리던 오라비 한확을 향해 "누나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남아 있는 동생마저 팔려고 하는가!"라 외치며 이불 등 혼숫감을 찢어버렸다니 짐작할 만하다. 비록 한계란이 1428년 서울을 떠날 때 행차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언니의 비극을 떠올리며 그녀를 '산송장(生送葬)'이라 했으니 주변의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조선 초기 공녀를 뽑아 명에 보내는 일은 나라의 큰일이었다. 아예 진헌색(進獻色)과 혼례도감이란 전담부서를 둘 정도였다. 명은 여종과 요리를 담당할 집찬녀 등 다양한 공녀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후궁 감을 요구해올 경우엔 전국에 혼인금지령을 내리고 도별로 경차내관(敬差內官)을 보내 그야말로 '엄선'했다.
이렇게 두 달간 법석을 벌인 끝에 30명의 처녀를 뽑아 서울에 모아놓고는 의정부의 재심을 거쳐 다시 7명으로 압축하고, 이들을 명나라 사신이 경복궁에서 최종 심사를 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명의 사신이 처녀들의 미색이 떨어진다고 트집을 잡기도 했다. 또 처녀들 중 일부는 일부러 그들의 눈 밖에 나려고 애쓰기도 했는데 그럴 경우 딸을 잘못 가르친 죄로 일부 처녀의 부친이 파직되거나 귀양을 가기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은 "처녀를 숨기고 알리지 않는 자나 나이 비슷한 못생긴 다른 아이를 대신 내놓는 자는 왕의 명령을 어긴 죄고 처벌하고 가산을 몰수하여 신고한 자에게 상으로 주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했단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꼽히는 세종의 말이라니 더욱 기막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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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