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금메달 후보인 양궁 선수들에게 전용 렌터카 배정하는 등 공들여
정주영 회장,여자개인전 촉각…70m서 김 선수의 한 발 사라지자 애태워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이던 1984년 LA 올림픽을 진두지휘했다. 다음 대회인 88년 서울올림픽 개최국으로서 LA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야 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금메달을 땄으나 80년 모스크바 대회에는 불참하는 바람에 여전히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LA 올림픽에서 한국이 가장 자신하는 금메달이 양궁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김진호의 여자개인전 금메달을 확신했다. 김진호는 예천여고 재학 시절인 7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30·50·60m, 개인종합, 단체)에 오르며 한국 양궁을 세계에 알린 주역이다. 또한 올림픽 직전인 83년 LA 세계선수권에서도 5관왕을 차지했으니 금메달을 확신하는 게 당연했다. 격투기 같은 종목은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당시만 해도 양궁은 순수 기록 종목이어서 의외성이 거의 없었다.

정 회장은 확실한 금메달 후보인 양궁을 지원하기 위해 양궁을 궁도협회에서 분리했다. 그리고 양궁 대표선수들을 개막 1개월 전에 미리 LA로 보내 현지 적응 훈련을 시킬 정도로 공을 들였다. 양궁 경기장인 엘도라도 공원 경기장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전용 렌터카까지 마련해 줬다.
당시 올림픽 양궁은 거리별로 시상하는 세계선수권과 달리 남녀 개인전만 있었다. 남자는 30·50·70·90m, 여자는 30·50·60·70m의 4개 거리별로 36발씩 총 144발을 쏜다. 그걸 두 차례 해서 총 288발의 합계로 우승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정 회장은 여자개인전이 벌어지던 날 올림픽 선수촌을 방문했다. 선수촌에는 대한체육회 배순학 국장이 현장의 소식을 취합하고 있었다.
김진호는 예상대로 경기 내내 1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70m에서 한 발이 사라졌다. 1점도 아니고, 아예 과녁을 벗어나 버렸다.
양궁에서 가끔 0점을 쏘는 실수가 일어나긴 한다. 아예 조준을 못 해서 그런 경우는 없고, 시위를 당길 때 '딸깍'하는 소리를 착각하거나 화살이 팔에 맞고 떨어지는 경우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가 그런 실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확실한 금메달 후보가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그것도 올림픽에서 저지른 것이다. 0점을 쏜 김진호가 졸지에 3위로 밀리고, 중국의 리링잔이 1위로 올라섰다. 그나마 서향순이 2위라서 다행이었지만, 금메달이 아니면 소용이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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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