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요직이 '개고기 주서'로 불려…문정왕후에 맞선 김안로 사약받은 후 그 벼슬도 떨어져

'개고기주사'란 말이 있다. 성질이 고약하고 막된 사람을 가리키는 '개고기'란 서울 사투리에서 온 말인데, 요즘 말로 하면 '진상' 정도 되겠다.
물론 지금은 거의 사어(死語)가 되다시피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38년엔 〈개고기주사〉란 대중가요가 등장했을 정도로 널리 쓰였다.
속담을 소재로 역사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우리말에 깃든 조선 벼슬』(이지훈 지음, 푸른역사)에 따르면, 이는 '개고기주서'가 변한 말인데 여기엔 『중종실록』에까지 실린 웃픈 사연이 있다.
중종 때 이팽수란 인물이 있었다. 32세이던 1531년 문과에 급제했으니 나름 능력이 있었지만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그는 부친과 동향 사람인 당대의 권력자 김안로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김안로는 자기 아들이 공주와 결혼해 중종과 사돈이 된 덕에 좌의정까지 오르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권신(權臣). 게다가 이팽수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김안로는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판서로 있었으니 이팽수로선 묘수라 할 만했다.
아버지를 통해 김안로가 개고기를 즐긴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팽수는 그에게 질 좋은 개고기를 줄창 선물했다. 그 덕인지 1534년 김안로의 추천으로 승정원 주서 직에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정7품으로 비록 품계는 높지 않지만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자리였다. 임금의 명령을 기록, 관리하는 업무를 하는 만큼 출세의 지름길로 꼽혔으니 당연하다.
절대권력자의 최측근에서 일하는 만큼 승정원 주서라는 그 자체가 문장이나 도덕성이 뛰어나다는 증표가 되었고, 실제 그 자리를 거치면 벼슬길이 탁 트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과 급제자 32명 중 23등에 그친 이팽수가 그런 노른자위를 차지했으니 당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사람들은 이팽수가 김안로에게 개고기 뇌물을 써서 좋은 벼슬을 얻었다 수군거리면서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불렀다. 여기서 장(獐)은 노루란 뜻이어서 '가장'이란 집에서 키우는 노루 즉 개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주서'란 집에서 키우는 노루로 된 주서란 비아냥이었다.
이팽수의 '성공' 사례는 다수의 모방범을 낳았는데 그중 진복창이란 이도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바쳤는데, 이팽수 것만큼 맛이 좋지 않았는지 괜찮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한편 '개고기주서'의 뒤끝은 좋지 않았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김안로가 1537년 중종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를 폐출하려 시도하다 실패한 후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당했기 때문이다. 이팽수는 김안로가 실권했을 때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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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