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15:11 (화)
[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35) 마리 앙투아네트의 교훈
[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35) 마리 앙투아네트의 교훈
  • 송명견(동덕여대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 mksongmk@naver.com
  • 승인 2024.11.0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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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 시집와 역사의 평가와는 달리 세계패션사에 족적 남겨
땅에 끌리는 긴 스커트의 길이를 짧게해 크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활동적으로 바꿔
적대국의 왕녀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극심한 흉년까지 겹치자 민심 흉흉해져
정치에 직접 개입 하지도 않았는데 '죄목'도 모호한 상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

왠지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떠오르곤 한다. 현대판 마리 앙투아네트들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비극의 주인공은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그 악명이 높다.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황실 안에서 공경과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성장하였다. 사교적이고 활달하며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37살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어야 했다. 나아가 사치스럽고, 비도덕적이고 포악한 여인으로 기억되어진다.

역사가 어떻게 평하든 그녀는 '세계 패션사'에 화려한 족적을 남긴 공로자다. 그녀는 프랑스 뿐 아니라 전 유럽의 유행 선도자였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거둔 후에도 그녀의 패션은 뒤이어 올 유행의 여지를 열어놓기도 하였다. 그녀의 창의성은 특별하였다.

땅에 끌리는 긴 스커트의 길이를 짧게 하여 최초로 발목을 드러내고, 크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활동적으로 간결하게 바꾸기도 했다. 더욱 특기할만한 것은 궁중 안에 농원을 설치하고 젖을 짜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드레스를 만들어 유행시켰다.

특히 그녀가 말년에 입은 슈미즈 드레스는 엠파이어 드레스의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이 드레스는 인도에서 생산된 면모슬린(성글게 평직으로 짠 면직물)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로 그 면모슬린이 19세기 초 유럽을 강타한 엠파이어 드레스의 소재였다.

이 무렵 영국은 바로 이 면직물에 눈이 멀어 인도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당시의 면 생산량으로는 유행의 물결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운 좋게 증기기관, 석탄 같은 동력이 개발되면서 면모슬린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영국은 이 유행 덕분에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슈미즈 드레스(왼쪽), 19세기 초 엠파이어 드레스(오른쪽)/이코노텔링그래픽팀.
슈미즈 드레스(왼쪽), 19세기 초 엠파이어 드레스(오른쪽)/이코노텔링그래픽팀.

그러나 최초로 면직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인들의 맹공격을 받아야했다. 왕비가 값싼 천으로 된 옷을 입어 왕실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적대국 영국의 면직물 산업을 도운 행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평소 사치스러워 국고를 탕진한다고 아우성치던 프랑스인들이었다.

불행히도 그녀가 하는 것은 모두 문제가 있고 나쁘다고 비난하며 미워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했다.

그녀에 대한 미움은 정략 결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770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시집왔다. 4년 후 루이 15세가 사망하고, 그녀의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처음부터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오랜 동안 적대 관계에 있어서 국민적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큰 실패는 바로 '적대국의 왕녀'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한 것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넘어야만 했는데, 아쉽게도 그녀는 이 벽을 넘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가 시집오던 시기의 프랑스는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취해 있었다. 동시에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뒤바리 백작 부인과 주변의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취해 궁중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있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루이 15세는 당대의 거부이자 경제학자였던 실루엣(Ettienne de Silhouette)을 재무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경제개혁은 당연히 실패했다. 귀족들은 긴축 정책을 펴는 재무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심지어 그를 그린 뒤 외곽선만 남기고 안쪽을 까맣게 칠해놓고 '실루엣'이라며 비아냥대었다. 오늘날 복식용어로 사용되는 실루엣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실로 프랑스 왕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집오기 전에 이미 멍들어 기울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에 패션 감각까지 뛰어났던 왕비는 큰 구경거리였다. 그녀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베르사유궁전은 매일 북새통을 이뤘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국민들은 앙투아네트를 '적자부인' 또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이 재정 악화의 원인이 왕비의 사치라고 몰아붙였다.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의 눈에는 국고를 낭비하고, 베풀 줄도 모르는 사치스럽기만 한 왕비일 뿐이었을 것이다. 한 자료에 의하면, 루이 16세 부부가 검소했던 탓에 다른 왕비들에 비하면 이들은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오해도 그녀가 넘었어야 할 산이었다. 아쉽게도 이 산 역시 그녀는 넘지 못하고 미움을 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안한 정국에 극심한 흉년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급기야 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수습하지 못한 루이 16세는 처형당해야 했다. 뒤이어 마리 앙투아네트도 형장에서 목이 잘리는 운명이 되었다.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고, 죄목도 모호한 상태에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녀의 죄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분노에 가깝게 커진 '대중의 미움'이 가장 큰 죄목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본다면 왕비라는 공인으로서, 세상 물정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점, 적국의 왕녀라는 엄연한 사실을 방관한 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만 취해있었던 점등이 미움을 키웠던 죄목이 아니었을까.

오늘날에도 곳곳에 다양한 현대판 마리 앙투아네트들이 있다. 혼자만 누리지 말고, 조심스레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공부해야 할 것 같다. 부디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운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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