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환 공장장이 깜짝 놀라 되묻자 "이왕 사업 하려면 석유서 섬유까지 다 해야지"
최종건은 1970년 3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 울산직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울산직물은 수원의 직물 공장만으로는 원자재에서 완제품까지 섬유의 수직계열화를 이룩하기에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1968년 8월 설립한 계열사였다.
울산시 우정동 369번지 일대 약 4만 평의 부지에 들어선 울산직물 공장은 자동직기 800대에 가연설비와 염색가공 설비까지 설치해 원사가공부터 후처리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었다.
"내가 저거 인수해야 하는데."
울산직물에 방문한 어느 날 손가락으로 차창 밖을 가리키며 최종건이 한 말이었다. 울산에 들를 때마다 그는 당시 국내 유일의 석유 회사였던 대한석유공사 건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곤 했다. 그와 동행하던 울산공장 공장장 김봉환은 최종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석유 회사까지 하시려고요?"
최종건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왕 사업을 하려면 석유에서 섬유까지 전부 해야지."
최종건은 이미 그때 그 누구도 상상하기조차 힘든 큰 꿈을 품고 있었다. 개인 기업인 선경에 비해 대한석유공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영기업체였지만, 그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두 원사 공장이 완성되고 선경은 명실상부한 섬유업계의 대표 기업으로 부상했다. 1969년 2월부터 생산을 시작한 선경의 폴리에스터 원사는 당시 기술 합작을 한 일본 데이진의 제품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폴리에스터에 대한 아무런 기술도 없는 선경이었지만, 데이진에서 전수해준 이론과 기술을 뛰어넘은 결과였다.
스카이론(SKYRON)이라는 상표로 출시된 선경의 폴리에스터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69년 당시 연간 2,555톤에 달하는 원사 생산 능력을 갖춘 선경화섬은, 그러나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 건설을 위한 외화자금 융자조건으로 인해 원사의 국내 시판이 금지돼 있었다.
그해 예상 수요량으로 무려 4,765톤이 필요했던 정부는 결국 선경화섬에 대한 전량 수출 조건을 해제했으며, 선경화섬은 생산한 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할 수 있게 돼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편 선경화섬은 1970년, 이전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아세테이트 토우(목재와 펄프에서 생산하는 정밀화학제품으로 주로 담배용 필터 제조의 원료로 사용)를 생산해 전량을 전매청에 납품하며 연간 150만 달러의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