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의 건설차관은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자신만만했지만 일본서 뜻밖의 어려움

선경은 1966년 1월 '선경 5개년 계획'을 선언한 이래 불과 3년 만에 두 개의 원사 공장을 설립하고 단숨에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도약했다. 이는 오직 최종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과정은 매 순간이 위기일 정도로 지난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한 결단과 쉼 없는 추진력으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냈다.

최종건이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건설 허가를 받은 것은 1966년 6월 하순이었다.
공장을 짓는 데 있어 가장 큰 관건은 단연 자금이었다. 필요한 금액은 당시 돈으로 대략 29억 원. 이 가운데 15억 원을 외자로, 14억 원은 내자로 충당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선경직물의 자본금 총액은 1억 원. 그만큼 원사 공장을 짓는 것은 힘겨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최종건은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건립을 위한 정부 승인과 차관 도입이 이뤄지기도 전인 1966년 4월에 이미 수원시 정사동에 사놓은 공장부지의 정지작업을 추진했다. 그만큼 원사 공장 건립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어떠한 난관에 부딪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종건은 이토추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의 대일차관은 양국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했으며,
정부가 우선순위를 정해 교섭을 진행하도록 했다. 이 가운데 선경의 건설차관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상위에 올라 있기에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해 보니 정부가 통보한 우선순위는 단순한 참고 자료에 불과했다. 더구나 선경직물은 규모도 크지 않고 지명도도 낮아 일본 정부의 승인이 요원했다.
당황한 최종건은 어떻게든 차관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주일대사를 만나는 것부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결국 최종건은 당시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을 통해 장기영 부총리의 친서를 받은 후에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의 승인을 받은 것은 이듬해인 1967년 3월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