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제주도의 수출액 ( 1억9400만 달러 )의 51%인 9900만 달러 어치 담당해
박성식 대표는 '일본삼성전자' 근무 후 2000년에 메모리반도체 설계회사 창업
대만 업체들, "탁월한 역량" 없는데 창업을 비교적 쉽게 하는 것 보고 자극받아
창업 후 5년간 '시련' 딛고 노키아에 납품해 활기를 띠다가 노키아 몰락에 충격
제주반도체 120명 중 제주 본사서 70명 일하고 판교엔 '핵심설계 인력'들 일해
박 대표 "반도체 더 발전하기위해선 설계 소기업의 위탁생산 '팹'(공장) 있어야"

'반도체전쟁'(영어로는 chip war)이란 말이 지구촌을 풍미하고 있다. 소비적 관점에서 보면 반도체가 들어간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 공동체는 지구상에 없다.
심지어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도 인터넷을 배우는 세상이다. 허지만 반도체의 설계, 생산, 판매의 공급망을 쥐락펴락하며 판도를 휘어잡고 있는 나라는 열 개 나라 정도다.
이들 국가 중에 한국이 들어가 있다는 반도체전쟁이란 말이 실감있게 들리는 이유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총 수출액의 약 20%, 돈으로 치면 약 1,000억 달러가 반도체 수출액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23일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반도체가 민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반도체는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칩과 비메모리칩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메모리칩은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을 하는 반도체로 쉽게 비유하면 기억력을 보존하는 노트필기나 도서관과 같다. 비메모리칩은 무엇을 연산(演算)하고 답을 풀어내는 기능을 담당하는 반도체로 사람의 뇌기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비메모리칩을 '시스템반도체'라고 불리기도 한다. 컴퓨터를 비롯하여 각종 전자기기는 이 두 가지 반도체가 함께 탑재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인텔이 컴퓨터 용으로 만들어내는 CPU(중앙처리장치)나 엔비디아가 AI를 위해 만들어 내는 GPU(그래픽처리장치)는 시스템 반도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로 생산하는 반도체는 메모리칩이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강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와 같은 거대 기업 틈새에서 생존하는 메모리반도체 기업이 한국에는 많다. '제주반도체'도 그 중 하나다. 제주반도체는 주로 자동차, 스마트폰, 사물인터넷에 필요한 메모리칩을 설계하는 회사다. 제주반도체처럼 제조공장은 없고 설계만 하는 반도체기업을 팹리스(fabless)라고 하며 생산시설을 갖춘 기업을 파운드리(foundry)라고 한다.
제주반도체는 공장을 가진 대만 반도체기업에 위탁해서 반도체를 생산해서 세계시장에 내다 판다. 이 기업의 2023년 매출액은 1,450억원이고 그중 85%가 수출로 벌어들였다. 사원이 130명이니 1인당 약 11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탄탄한 기업이다.
전쟁으로 불리울 만큼 경쟁이 치열한 분야가 반도체산업이다. 그럼에도 제주반도체가 건강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삼성이나 하이닉스가 손대지 않는 틈새시장을 잘 공략했기 때문이라고 반도체업계에선 평가한다.
제주반도체는 올해 연초 여의도 증권가의 뜨거운 화제였다. 작년 10월 하순까지 주당 4천원 대에 맴돌던 주가가 올해 1월 하순 3만8천원까지 상승했다. 불과 100일 만에 800% 넘는 폭등이었다. 어느 경제신문이 "제주도의 일등 수출품은 광어도 밀감도 아니고 반도체"라고 크게 제목을 달았다.

경제신문 보도가 맞다. 제주도청 첨단산업국에 확인해 보니 2023년 제주도의 수출액은 1억9천4백만 달러였고, 그 중 반도체 수출액이 9천9백만 달러였다. 혼자서 세운 수출 실적이 제주도 수출 총액의 51%를 차지했다.
제주반도체가 생존해가는 방식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생태계의 한 구석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제주도는 21세기 들어서 국제자유도시를 표방해왔다. 그러나 한때 중국관광객이 폭증한 것 외에는 경제적으로 이룬 성과가 별로다.
이런 견지에서 제주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 칩을 설계하는 첨단산업이라는 점, 작년 매출액 중 85%가 외국 수출로 벌어들였다는 점, 제주에서 반도체를 설계만 하고 생산은 대만의 파운드리기업 '파워칩' 에 위탁해서 생산한다는 점 등 글로벌 기업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최근까지도 대부분 제주도민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고 그래서 관심도 받지 못했던 제주반도체는 어디서 생겨나서 제주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제주도당국자들이 입만 열면 첨단산업유치를 얘기하고 있는 판인데, 하이테크 산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회사가 제주도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산업생태계가 반도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이 회사가 제주도에, 또 한국사회 전체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볼 기회가 있었다. 제주대학교 공대학장을 지낸 이광만 박사(반도체)와 차담을 나누다가 제주반도체 얘기가 나왔고, 그 자리에서 박성식 제주반도체 대표와 만날 기회를 주선해 주었다. 경기도 판교 미래에셋 벤처타워에 위치한 제주반도체 사무실에서 박성식 대표와 두어 시간 대화했다. 대화의 화제는 제주반도체 창업과정, 본사를 제주로 이전하게 된 배경, 현지의 인력채용 현황, 제주반도체의 미래와 제주도의 첨단산업 유치의 가능성 등이었다.
박성식 제주반도체 대표는 일본근무를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로 삼성전자 출신 창업 경영자다. 1990년대 말 '일본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후 2000년 메모리반도체 설계회사를 만들었다. 물론 당시는 제주반도체란 이름도 쓰지 않았다. 2005년 본사를 제주도로 이전하고 회사이름도 '제주반도체'로 바꿨다.
그가 창업하게 된 동기는 일본 근무 때 대만의 반도체 기업 창업자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이 아주 탁월한 역량을 가진 것도 아닌데 창업을 비교적 쉽게 하는 것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박 대표는 미국 등에 사는 전직 삼성직원을 불러다 팀을 꾸려 주로 모바일(휴대폰)용 메모리칩 에스램(SRAM)을 설계했다. 그런데 스타트기업으로서 두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첫째 설계한 제품을 제대로 만들 공장을 구할 수가 없었고 둘째 판로를 확보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첨단 장비와 시설을 갖고 있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는 사양이 낮은 메모리 반도체를 소량으로 위탁생산해 주지 않는다. 낮은 수준이었지만 반도체 제조설비를 갖춘 동부그룹 반도체회사(DB하이텍)에 교섭해서 메모리칩을 찍어냈으나 품질이 썩 좋게 나오지 않았다. 박 대표는 "창업후 처음 5년간은 정말 끔찍하게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제주반도체에 기회가 찾아온 건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피처폰, 즉 통화만 가능한 휴대폰 시장이 피크를 이룰 때였다. 당시 세계 제일의 시장 점유율을 가진 핀란드의 노키아와 납품계약을 체결하면서 회사가 활기차게 돌아갔다. 설계한 메모리칩을 생산할 파운드리로 대만의 파워칩(Powerchip)생산시설을 이용했다.
회사가 날개를 단 듯했다. 그러나 5년 후 다시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 주력 고객 노키아가 몰락하면서 판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박 대표는 그때 판로와 제품의 다양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주반도체는 지난 10년에 걸쳐 자동차, 사물인터넷(IOT), 전화기 등에 탑재되는 각종 메모리칩 설계회사로 자리잡았다. 제주반도체의 메모리칩은 세계 여러나라에 수출되지만 중국이 절대적으로 큰 시장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세계 전자제품의 60%이상 만들고, 유럽기업들도 그들의 국가에서 만드는 전자제품에도 중국에서 조립한 기판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주반도체는 왜 이름까지 바꾸면서 제주 섬으로 이사하게 됐을까. 박 대표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제주반도체는 설계만 하고 대만의 공장에서 생산한 메모리칩을 85%나 중국을 비롯한 세계시장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회사가 구태여 수도권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박 대표 개인적으로 복잡한 수도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점도 작용한 듯하다. 둘째 이유는 2000년대 초반 수도권에서 멀리 본사를 이주하는 기업에게 법인세를 5년간 감면해주는 세제혜택 제도가 큰 영향을 줬다.
반도체공장은 지독한 오염물질 배출 시설이다. 그러나 반도체 설계는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고 오직 엔지니어들의 두뇌활동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설계만 하는 제주반도체는 청정자연환경 정책을 채택한 제주도에 딱 맞는 업종이다. 박 사장의 얘기에 의하면 회사의 제주도 이전은 사원 사이에서 큰 저항은 없었다고 한다.
어차피 판교 설계사무실을 두기로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살고싶은 사람은 판교로 출근하도록 하면 되었다. 오히려 공기 좋은 제주도로 비행기 타고 멀리 가는 것도 좋다는 사원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제주 이전을 결정했지만 반도체를 설계하는 엔지니어들, 일종의 고급두뇌 집단인 반도체 기업이 뿌리를 박았던 서울을 떠나 제주로 옮기는 것은 보통 지난한 일이 아니었다. 퇴근 후 또는 주말 사원들이 여가를 즐길 곳도 문화시설도 부족했다. 그 해소 방법으로 박 대표는 사원들에게 골프를 배우도록 했다. 골프연습장을 시간제로 빌려 코치를 초빙해서 레슨을 받게 해서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주로 남성들로 이루어진 반도체엔지니어 회사다 보니 생판 객지에서 적응해야 할 여성 배우자들과 초 중 고에 다니는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보통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회사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원들의 주거문제와 자녀들의 교육문제이다. 특히 자녀가 다녀야 할 학교가 서울에 뒤쳐져 보이지 않아야 사원과 그 부인들이 안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처음에 가장 크게 걱정했던 제주에서의 인력 수급 문제를 의외로 쉽게 풀었다고 말한다. 제주대학 출신 엔지이어들을 채용해 보니 반도체 설계작업에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제주로 이전하자 제주대 공대 학생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서울의 대학졸업자들에 비해 수준이 크게 떨어져서 당황했다. 제주대와 공동프로그램을 실시하여 학생을 훈련시키고 채용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주 청년들의 장점을 보게 됐다.
제주대 출신 엔지이어의 큰 장점은 반도체 설계 작업에 절대 필요한 우직함과 끈질김이라고 한다. 요즘 잘 나가는 기술회사는 대졸 사원들의 몇 년 근무하지 않고 다른 회사로 옮겨 버리는 이직사태로 고민에 빠져 있다.
제주 반도체는 사원의 60%가 제주대학 출신 엔지니어인데 놀라울만치 이직율이 낮다. 박 대표에 의하면 반도체 설계작업은 입사해서 3,4년 계속 사내교육을 받아야 어느 정도 일을 할 단계에 이르고 7년 정도 지나야 엔지이어로서 제대로 역량을 갖출 수 있다고 한다. 반도체설계는 우직하고 끈기 있는 엔지지어만이 버틸 수 있고 재량도 발휘할 수 있는데 제주대 출신이 적응을 잘한다고 박 대표는 크게 만족스러워 한다.
제주반도체 인력을 보면 제주 본사에 70명, 판교 사무실에 50명이 근무한다. 아직도 핵심설계는 판교 사무소에서 이루어지고 제주 사무실에서는 대만에서 생산해낸 웨이퍼나 칩 제품을 검사하는 일을 한다. 통신기술이 발달해서 대만공장에서 제품이 나오면 온라인을 통해 제주사무실에서 검사한다. 두뇌와 장비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과거에는 사원들이 대만출장을 자주 가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많이 줄어들었다.
제주반도체는 그 동안 사무실을 찾아 전전했으나 내년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내 3천평 부지에 사옥을 착공한다. 박 대표는 사옥이 완성되면 장차 판교사무실은 영업과 일부 설계업무만 두고 대부분 설계 업무도 제주본사로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설계회사가 제주도에서 업무를 하는데 불편한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을 먹고 사는 엔지이어들의 속성은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기 보다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적절한 문화오락시설, 가족과 자녀의 건강과 교육이 제공되는 곳을 좋아하는 경향이 미국 등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works)과 휴가(vacation)를 동시에 하는 워케이션( workation)이 젊은 세대들의 관심거리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주반도체는 지방 이전이 나름 성공한 케이스인 듯싶다. 그러나 첨단기업이 뿌리를 내리려면 하이테크 인력 개개인만 아니라 그 가족의 정주여건, 주택 의료 교육 문화시설이 중요하다. 특히 자녀교육은 절대적인 요인이다. 제주도에는 영어교육타운이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학교에서 설립한 5개의 국제학교가 있다. 그러나 아직 첨단기업의 제주이전과 관련하여 이 국제학교를 활용할 방안은 찾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박성식 대표는 제주반도체 같은 팹리스(설계회사)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불편을 토로했다. "대만은 수많은 반도체설계회사가 있는데 이들은 대만내 파운드리에서 쉽게 제품을 위탁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는 대만 파운드리에 위탁해서 만들지만 대만설계회사보다 위탁생산비를 훨씬 비싸게 받습니다. 대안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맡깁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려면 우리같은 소기업이 위탁생산할 수 있는 팹(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실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반도체산업 종합지원에 26조원을 쓴다는 계획이 공개됐다. 이 계획에는 설계회사와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산업) 관련 지원프로글램이 포함됐다고 한다. 대통령은 특히 "미니팹과 같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실증인프라는 기업이 원하는 수준으로 신속하게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반도체공장을 하나 짓는데 수십조 단위 천문학적 돈이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이용할 수 있는 미니팹도 정부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니팹은 제주반도체 같은 중소 반도체설계회사들이 목말라 하는 공장시설이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의 주축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이지만 이들 대기업만으로 발전할 수 없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그 주위에 모이는 생태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반도체산업국이 된 대만이 보여주는 모범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