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만 배럴의 원유 공급을 해달라는 요청을 불과 이틀 만에 받아 들여
유공지분 50% 보유하던 걸프가 한국철수 결정하자 '유공 인수경쟁' 격화
사우디 친구가 운영하는 아랍계은행서 1억달러 조달해 유공 인수전 승리

1979년 이란에서 시작된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에 또 한차례 비상사태를 몰고 왔다. 모든 기업에 비상이 걸렸고, 부도 위기에 내몰린 기업도 적지 않았다. 선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유 재고가 10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현물 시장 가격은 40달러를 넘어섰고, 그마저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종현은 지난 6여 년간 쌓은 우정을 믿어볼 적기라고 생각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하루 5만 배럴의 원유 공급을 요청한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불과 이틀 만에 최종현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기업은 국가 대 국가 거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정부의 위임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소식을 접하고 반색하던 정부의 태도가 변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최종현의 주선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정부 관계자는 선경이 아니라 대한석유개발공사를 통해 원유를 공급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거래 조건이 달라지자 이번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태도가 바뀌었다. 정부의 독촉에도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아랍인 특유의 기질과 고집이 작용한 결과였다.
선경이 위임장을 받은 건 이듬해 3월, 원유 공급 약속을 받은 지 4개월이 지난 후였다. 더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정부의 뒤늦은 조치였다.
최종현은 1980년 3월 19일 경제부총리 명의의 위임장을 발급받아 계약을 체결했다. 3년 간 하루 5만 배럴의 원유를 배럴당 24달러에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현물시장 가격이 42달러인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더구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최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약을 1월로 소급 적용했고, 몇 개월 후에는 5만 배럴을 추가로 공급하기도 했다.

1980년 3월에는 유공 지분 50%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 기업 걸프가 공급할 원유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정부는 숙고 끝에 유공을 민영화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유공을 인수하기 위한 재계의 총력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유공은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한 국내 유일의 기업이었다. 부채 비율 1,000%와 만성적인 적자가 문제로 부각되있지만, 원유 공급 안정과 경영 정상화 등을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어 유공 인수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부가 인수 기업으로 선경그룹이 최종 확정되었음을 발표하자 재계에는 일대 큰 파장이 일어났다.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켰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자신보다 수백 배나 큰 규모의 기업을 인수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인수 경쟁에 뛰어들었을 때 거의 모든 기업이 대체로 자산 규모와 재계에 대한 영향력, 현금 동원력에 경쟁 우위를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최종현은 오랜 기간 쌓아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해 원유 확보 능력을 직접 증명해 보였고,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친구들이 운영하고 있던 아랍계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를 조달하며 오일머니 유치 능력까지 증명했다. 정부가 이와 같은 선경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당연했다.
선경그룹은 유공 인수를 통해 단번에 재계 10위 기업으로 도약했다. 남들보다 앞서 오랜준비를 통해 얻은 결실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