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00:30 (월)
[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48) '大權재수' 불발
[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48) '大權재수' 불발
  •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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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2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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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출마위해 '3만 명의 추천인 명부' 작성 이내흔 사장에게 밀명
반대 할 것이 분명한 '정몽구, 정몽헌' 회장 두 아들에도 비밀에 부쳐
TV 뉴스에 발표한 '최종등록 후보명단'에 자신이 없자 정 회장 대노
차마 정 회장 앞에선 반대하지 못한 李사장 '잠적'해 '대선출마' 막아

사면 복권된 정 회장이 김영삼 대통령 앞에서 이제 경제발전에 전념하겠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 공식 회동 자리에서 김 대통령이 지나가는 말로 "아직도 대통령이 하고 싶습니까"라고 묻자 정 회장이 "그래요.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냥 아쉽다는 표현인 줄 알았으나 그게 진정한 속마음이었다.

정 회장은 죽을 때까지 92년 대선이 부정 선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선거 유세를 할 때 정 회장이 광주에 가면 30만 명이 모였다. 김대중의 텃밭에서도 이 정도 모였으니 당연히 당선될 줄 알았다. 정 회장은 개표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같이 낙선한 김대중의 동교동 집을 찾아가 부정 선거를 함께 문제 삼자고 제안했다.

92년 대선에서 낙선한 정주영은 이번엔 당을 만들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이었다. 정 회장은 92년 때보다 97년 당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아직 국가부도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경제 위기는 누구나 느끼고 있던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이 드러났고, 무엇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민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진은 동생 정신영(가운데)의 대학 졸업식에 함께한 정주영 부부. 사진=현대자동차그룹.
92년 대선에서 낙선한 정주영은 이번엔 당을 만들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이었다. 정 회장은 92년 때보다 97년 당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아직 국가부도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경제 위기는 누구나 느끼고 있던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이 드러났고, 무엇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민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진은 동생 정신영(가운데)의 대학 졸업식에 함께한 정주영 부부. 사진=현대자동차그룹.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라는 정 회장의 말을 들은 김대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곧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95년 사면 복권 후 현대 명예회장으로 복귀한 정 회장은 다시 열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환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97년 가을, 다시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비쳤다.

이 사실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정 회장이 대선 출마와 관련해서는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과 유인균 고려산업개발 사장, 그리고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 등 소수의 측근에게만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다. 정몽구, 정몽헌 회장 등 아들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으니까.

이번에는 당을 만들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이었다. 정 회장은 92년 때보다 97년 당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아직 국가부도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경제 위기는 누구나 느끼고 있던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이 드러났고, 무엇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민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려면 3만 명의 추천인 명부가 필요했다. 정 회장은 그 작업을 이내흔 사장에게 맡겼다. 여섯 군 데에서 5,000명씩 추천서 도장을 받아 중앙선관위에 등록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장은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2월 18일이 등록 마감일이었다. 저녁때쯤 정 회장이 이익치 사장을 호출했다.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이내흔이 이럴 수가 있어? 지가 도망을 가?"

알고 보니 이 사장은 추천서 도장을 받지 않았고, 선관위에 등록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등록을 마쳤을 거로 생각한 정 회장이 TV로 뉴스를 보는데 후보에 정주영 이름이 없었다. 무슨 착오가 있는가 하고 이내흔 사장을 호출했는데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측근 중의 측근이라고 믿었던 이 사장이 정 회장의 지시를 거역한 것이다. 당시 정 회장의 나이 82세였다. 5년 전 대선 패배로 현대그룹 전체가 위기에 몰렸던 경험을 했던 이 사장이 차마 정 회장 앞에서는 반대하지 못하고, '직무유기'와 '잠적'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10여 분간 씩씩대며 분을 삭이던 정 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나하고 전생에 원수가 진 사람도 아니고. 내가 사람 잘 못 봤어. 어떻게 연락 하나 없이 보고도 안 하고 이럴 수가 있어?"

정주영 회장의 두 번째 대선의 꿈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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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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