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21:40 (토)
[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27)역사 속 장갑 이야기
[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27)역사 속 장갑 이야기
  • 송명견(동덕여대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 mksongmk@naver.com
  • 승인 2024.02.2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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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들어 장갑은 권력과 존엄을 상징하는 동시에 계급을 나타내는 도구
신성로마제국이 유럽 제패의 기초를 놓은 힘이 되었다는 ' 장갑 결혼 ' 눈길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2000켤레 장갑 보유 … 여성 주요 액세서리로 애용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솜씨 좋은 언니가 털실로 장갑을 떠주었다. 손목에 꽃잎 모양이 장식된 건틀릿(Gauntlet․팔목이 길고 손가락을 다 덮은 다섯 손가락장갑)이었으니 그야말로 '예술품'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전교생 중 하나뿐인 그 장갑은 '귀족'이라는 증표였다. 어느 날, 그 귀한 장갑을 끼고 왼쪽 두 번째 손가락으로 울퉁불퉁한 시골 담벼락을 죽 그으며 지나갔다. 담벼락 끝에 도달해보니 그 두 번째 손가락에 구멍이 뽕 뚫려 있었다. '귀하신 몸'을 망가뜨리고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가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 장갑은 '잘사는 집'의 상징이었다.

장갑은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 해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장갑은 투탕카멘(재위 BC 1361〜BC 1352년)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이다. 중세에 들어 장갑은 권력과 존엄을 상징하는 동시에 계급을 나타내는 도구였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주교만이 손가락장갑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신분이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벙어리장갑만을 껴야 했다. 장갑은 금은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면서 결혼예물로 주고받기까지 했다.

장갑이 유럽 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전쟁과 정략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가의 영향력을 펼쳐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카스티야-아라곤 왕국과 굳건한 동맹을 맺기 위해 자신의 딸과 상대 왕국 태자의 결혼을 추진했다.

자료(김홍도, 활쏘기《단원풍속도첩》(왼쪽))=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 남성 장갑, Mila Contini, Fashion(오른쪽)/이코노텔링그래픽팀.

이를 알게 된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프랑스 공주와의 결혼을 먼저 성사시키려하자 거리상으로 프랑스보다 멀리 있던 막시밀리안 1세는 궁리 끝에 신랑의 장갑을 놓고 먼저 결혼식을 치렀다.

당시 결혼식 때 나눠 끼는 장갑은 결혼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므로 이를 이용해 딸을 결혼시킨 것이었다. 이 결혼식은 신성로마제국이 유럽 제패의 기초를 놓은 힘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장갑이 국가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장갑은 오랜 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엽,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가 장갑을 애용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2000켤레 이상의 장갑을 멋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17세기 들어 장갑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손에 끼기도 하고, 손에 들거나 벨트에 끼는 것이 유행이었다. 남성들은 17세기를 정점으로 사냥할 때 외에는 장갑에 집착하지 않았으나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액세서리로 애용되었다. 산업혁명에 이어 1834년, 장갑을 짜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마침내 장갑도 산업으로 발돋움한다.

우리 조상들도 일찍이 손을 보호하는 손싸개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장갑을 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시대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년?)의 풍속도첩에 장갑을 끼고 활을 쏘는 사람이 등장한다. 다섯 손가락이 그대로 나타나는 장갑이다. 이런 장갑을 우리는 장갑(掌匣), 일본은 수대(手袋), 중국은 수투(手套)라고 부른다. 한중일 3국의 명칭이 다른 점으로 미루어보면 장갑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조상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대 변천에 따라 장갑(掌匣/掌甲)은 여러 용도와 형태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 장갑시장 규모는 2023~2027년 사이 연간 142억899만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 한 예로 2021년 미국의 상업용 장갑 수입액이 7억2000만달러로 전년 대비 8.3% 증가했다. 이들 중 중국산이 전체 수입량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액도 2021년 2180만달러로 전체 시장의 3%를 점유했다. 한국은 스리랑카, 파키스탄, 베트남에 이어 대미 장갑 수출국 5위였다.

세계 장갑시장의 흐름은 과거 패션과 보온 기능, 그리고 품위를 상징하던 역할에서 나아가 화학물질이나 상해에서 손을 보호하고 위생적이고 작업 능률을 높이는 데 필요한 산업용 장갑 시대로 접어들었다. 예쁘게 만들어 아끼며 오래 쓰는 장갑보다 일회용 장갑의 수요가 엄청나게 커졌다. 장갑을 통해서도 변화하는 세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큰 변화 뒤에는 썩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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