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일하는 사람들은 풀려난다"는 속담 나돌 정도로 여러 도시서 법으로 금지
하지만 산업화 이전에도 밤일 빈번…"낮엔 원하는 만큼, 밤엔 할 수 있는데까지"관행
역사 책을 읽다보면 무심코 지나치거나 그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새삼 놀랄 때가 적지 않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로저 에커치 지음, 교유서가)에서 만난 대목도 그렇다.
언뜻 에세이집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이 책은, 산업혁명 이전 유럽의 밤에 얽힌 역사를 살핀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교 역사학 명예교수가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밤의 문화사를 탐구한 진지한 책인데 꽤나 흥미로운 시사점이 많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밤과 작업, 즉 일에 관한 대목이다.
요즘에는 업무 성격상 하루 3교대로 밤낮없이 가동하는 작업장도 있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단다. 에스파냐에는 "해가 지면 일하는 사람들은 풀려난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많은 노동자들이 밤에는 고통스런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게 관행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여러 도시에서 아예 법령으로 야간 업무를 금지했다.
물론 이건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복지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밤의 신성모독에 대한 종교적 반대와 더불어 밤에는 화재의 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전기의 혜택을 누리기 전이었으니 촛불 아래 만들어진 상품의 질도 문제였던 모양이다. "여자와 무명옷은 촛불 아래서 고르지 말라"고 경고하는 속담도 있었다니 말이다. 여기에 작업을 낮시간으로 제한하면 시 당국은 가격 통제나 세금 부과를 통해 시민의 경제활동을 장악하기 쉬웠던 점도 작용했다.
특이한 것은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고 긍지를 높이기 위해 장인들 스스로 야간 작업을 금지하기도 했다. 끌과 줄 등 도구를 다루는 숙련된 솜씨와 확실한 조명이 필요한 금은 세공업 같은 것이 대표적이었다. 13세기 프랑스 디종에서는 길거리 난동이 벌어졌을 때 한 식기 제조업자는 밤 늦게까지 일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린 사례도 있다.
이 같은 추세는 근대 초에 이르러 새로운 시장이 등장하는 등 지역경제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달라졌다. 화재의 위험은 여전했지만 길드나 시 당국은 새로운 수요에 맞추기 위해 밤 노동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엔 낭만이 있었으니 1563년 제정된 영국의 제조업자 법을 보자. 이 법은 기술자나 다른 노동자들이 아침 5시부터 저녁 7~8시까지, 가을과 겨울에는 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일하도록 규정하고, 휴식과 식사 시간으로 2시간 반을 주도록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지은이는 산업화 이전에도 낮이 짧아지는 가을부터 봄 사이에는 야간 노동이 상당히 널리 이뤄졌다면서 그 증거로 "낮에는 원하는 만큼, 밤에는 할 수 있는 데까지"란 17세기 속담을 소개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생존의 압박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야간 작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