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4:50 (토)
[김성희의 역사갈피] 얼 빠진 '구한말 해외여행'
[김성희의 역사갈피] 얼 빠진 '구한말 해외여행'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4.02.05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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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지배하던 일제 통감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서 일본관광단 모집
한일 합병 1년 앞두고 일선(日鮮) 융합 도모하는데 대신 등 유력 인사 줄서
항일신문 '대한매일신보' "가사(家舍)까지 전당해 관광여비로 쓰나" 비꼬아
1909년 4월 초 〈경성일보〉에 '제1회 일본관광단' 모집 광고가 실렸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1909년 4월 초 〈경성일보〉에 '제1회 일본관광단' 모집 광고가 실렸다. 양반·유생·실업가 등에게 일본의 선진 문물을 시찰할 기회를 주어 이른바 '일선(日鮮) 융합'을 도모하려 한다는 명분이었다.

〈경성일보〉는 당시 사실상 대한제국을 지배하던 일제 통감부의 기관지였고, 한일 강제 합병이 이뤄지기 불과 1년 남짓 앞두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관광경비가 1인당 100원이 넘었으니 면서기의 석 달치 월급보다 많고 쌀 10석 이상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니 누가 관광단을 신청하랴 싶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얼빠진 이들은 또 그대로 있었던지 예상을 뛰어넘는 신청인이 몰려 당초 50인으로 계획했던 관광단은 110명으로 늘었는데 그중엔 궁내부대신, 시종원경, 한성은행 지배인, 제국신문사 주필 등 정·재·언론계의 내로라 하는 유력 인사들도 끼어들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들의 관광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은 모금운동을 벌였고, 관광단이 출발하던 날에는 남대문정거장에서 성대한 환송식까지 열렸다. 물론 이 전별행사는 관변단체인 한성부민회가 주관한 행사였고 대중의 반응은 이와 달랐다.

영국인 베델이 주도하던 항일신문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4월 4일 자에서 "관광단이 외국의 문명을 수입하기 위해 가는가…황명을 받아 사신 가는 행차인가"라고 묻고는 '산수 구경할 행락객' '인물 구경 가는 행인'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4월 15일 자에서는 "동포 구제는 고사하고 제 친족이 죽는대도 돌보지 않더니 관광여비 쓰려고 가사(家舍)까지 전당했네"라고 한가로이 외유를 떠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꾸짖었다.

이 같은 비판은 마땅했으니 한 달여 동안의 일본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 '지도급 인사'들은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고는 "이번 여행으로 일본인이 한국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했으며,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나발을 불고 다녔다.

그러니 통감부로선 톡톡히 '남는 장사'였던지 강제 병합 직전에 '제2회 일본관광단', 병합 직후엔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70여 명이 참여한 '조선귀족 관광단'을 지원했다. 이들 친일 고관 부부들 역시 이토 히로부미의 무덤을 참배하는 등 일정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한일병합의 전위대 구실을 했다.

이건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의 마지막 1년간의 다양한 사실을 짚은 『제국의 황혼』(정진석 외 지음, 21세기북스)에서 맨 앞에 실린 이야기다. 며칠 전 지난해 3분기까지 외국 관광객이 우리나라에서 11조 4,400억 원 쓸 때 한국 관광객은 해외서 20조 5,300여억 원을 썼다는 기사에, 엔화 가치가 떨어져 일본 관광이 붐이라는 이야기가 겹쳐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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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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