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새해 차례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정치 참여 통고 했으나 모두 반대
임직원 상당수 통일국민당 입당…3월 총선서 단번에 원내 교섭단체로

호기는 좋았으나 당시 노태우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힘이 없었다.
불과 3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912억 원을 납부하기로 했다. 그러나 완전히 항복한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세간에는 정주영의 신당 창당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92년 1월 1일, 정 회장은 새해 차례를 지내기 위해 청운동 집에 모인 가족들에게 정치 참여를 통고했다. 정인영 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다. 단 한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업이나 계속하지 다 늦게 시궁창 같은 정치판에는 왜 뛰어들려고 하느냐고 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만 77세라는 나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자칫하면 그룹에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때 정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재산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지? 내가 고향에서 내려올 때 깜장 고무신 하나 신고 왔어. 최악의 경우 망하더라도 너희들 구두는 신을 수 있지 않겠어? 내 건강 핑계 대지 마. 나 건강해."
이 이야기에 모든 가족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월 3일, 정주영 회장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 창업주로서, 아직 청년처럼 정정한 체력의 소유자로서 경영에서 물러날 때는 아니었다. 그만큼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강했다. 드디어 1월 10일, 정주영이 총재인 통일국민당이 창당했다. 재계 총수가 정당 총수가 된 첫 번째 사례였다. 양당 체제에 심드렁했던 국민은 새 정당의 탄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대한민국 정치에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정주영의 호소는 제법 먹혔다. 현대그룹 전체가 뛰었다.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임직원 상당수는 아예 통일국민당으로 소속을 옮겼다.
3월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은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무려 31명의 국회의원을 탄생시켜 단번에 원내 교섭단체가 됐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민자당 텃밭으로 여겨지던 대구 경북과 강원도, 그리고 김종필이 버티고 있던 충청권에서도 상당한 의석을 얻었다. 이로 인해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과반 확보가 실패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주영 총재는 전국구 3번이었고, 정몽준 의원은 울산 동구에서 재선됐다. 현역 부자父子 의원의 탄생이었다. 이주일·최불암· 강부자 등 연예인도 대거 의회에 진출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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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