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출신의 일류 도안사 1년여 공들여 영입해 공장장으로 전격기용
최종건 창업회장,믿고 맡기면 지원 아끼지 않는 등 직원능력 발휘 유도

1955년 가을, 닭표 안감이 시장을 석권한 이후 최종건의 관심은 겉감으로 확대되었다. 안감의 수요는 한계가 분명하며, 선경직물의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주력 생산 품종을 겉감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최종건은 제3공장에 일본에서 대폭 견직물을 짜는 기계를 수입해 들여놓았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은 기업가의 철저한 현실 파악과 정확한 예측, 그리고 강한 실천력에 기인하는데, 그는 이러한 자질을 고루 갖춘 기업가였다.
"남보다 먼저 부가 가치가 높은 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나갈 때 기업은 날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선경직물이 선보인 견직물은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타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기술력을 갖추었음에도, 문제는 고객의 취향에 맞는 문양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이가 바로 1년 동안 기다려 영입한 조용광이었다.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일류 도안사일 뿐 아니라 공고 기계과 출신으로 문직기(무늬를 짜는 기계)의 특성을 잘 알고, 더구나 프리랜서로 일하며 동대문시장의 직물 동향까지 밝은 조용광은 공장을 맡길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최종건은 그를 영입과 동시에 공장장으로 전격 임명했다.
조용광은 공장의 곳곳을 점검하며 문제점들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대폭 문직기로 소폭 견직물을 짜는 일이었다. 여간 비효율이 아니었는데, 시장에서 30인치 견직물만 찾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가 먼저 만들면 되지요."

제품 개발을 통해 수요를 주도하자는 조용광의 말에 최종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의구심을 품는 임원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조용광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후 60인치 대폭 견직물이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던 1958년 1월, 조용광은 이번에는 대폭 견직물의 가격을 올리자는 제안을 했다.
더구나 잘 나가는 대폭 견직물에 반폭짜리 직물을 한 필씩 10% 할인한 가격으로 끼워 팔자고 했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대폭 견직물의 이윤을 높이는 한편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까지 소진하자는 일석이조의 묘안이었다.
동대문시장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조용광다운 제안이었다. 최종건은 이번에도 조용광의 아이디어에 적극 호응했다. 이것은 최종건 리더십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그는 한 번 믿고 맡기면 어떤 의견이든 최대한 존중하고 전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럴수록 직원의 능력과 노력은 더욱 발휘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