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0 23:55 (목)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⑱구로사와 감독의 원폭인식(3)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⑱구로사와 감독의 원폭인식(3)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4.01.30 0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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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산 자의 기록' (生きものの記録)에서 '원자폭탄'을 '바보 같은'으로 표현
시간이 지나 1990년 '꿈'이란 영화선 '바보같은 인간'은 '욕심많은 인간'으로 변화
무산될 뻔 했던 '원폭 프로젝트'가 살아난 것은 '1억옥쇄' 전략으로 버틴 일본 탓도

누구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35년이나 지난 뒤라면 안 바뀌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예외는 아니다. 1955년 만든 첫 원폭영화와 1990년 두 번째 원폭영화에서 우리는 '원폭'에 대한 아키라 감독의 시각차를 엿볼 수 있다. 영화의 '초점(focus)'이 '원폭 자체'에서 그것을 만든 '인간'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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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1955년 작 '산 자의 기록'(生きものの記録)에서 '바보 같은'으로 표현되는 대상은 원자폭탄 그 자체였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1990년 영화 <꿈>에서 이 '바보 같은'의 대상은 '인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인간에게는 '욕심 많은' 인간이라는 비판까지 더해진다. 이는 확실한 인식의 변화다. 비난의 대상이 '원자폭탄' 자체에서 '그것을 제조한 인간'으로 전환된 것이다. 필자는 이를 '구로사와 감독의 원폭에 대한 2단계 인식'이라 부른다.

필자가 보기에,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감독의 이 '두 개의 인식'이 갖는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몇 차례 얘기했던 대로,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감독의 첫 번째 인식 단계에서 포커스는 '공포'에 맞춰져 있다. '공포'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인식단계에서 그 포커스는 대상이 달라진다. '공포' 그 자체에서 원폭의 '원인 및 결과'에 맞춰진다. '원인'은 '원폭을 개발한 인간(또는 인류)'이며 '결과'는 '파멸(또는 업보)'가 된다.

마지막 에피소드 8화 ‘물레방아 있는 마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8화 '물레방아 있는 마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왜 <산 자의 기록>, 즉 1단계 인식에서 지칭하는 '바보 같은 것'과 <꿈>, 즉 2단계 인식에서 지칭하는 '바보 같은 것'이 달라졌나를 이해할 수 있다. 1단계 인식에서 '바보 같은 것'이 '원폭 그 자체'였던 이유는 곧 '원폭 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던 반면 '원인 및 결과'에 강조점을 둔 2단계 인식에서는 포커스가 '개발자'에게 맞춰져 있다. 따라서 2단계 인식에서 얘기되는 '바보 같은 것'은 원폭이 아닌 '인간' 또는 '인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감독의 2단계 인식에 등장하는 '인간', 즉 '원폭을 제조한 인간'은 도대체 누구일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인류' 전체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핵은 '죽음'이다. 인류는 '죽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때 '인류'의 대립자는 무엇인가? '자연'이다. '자연'은 '생명'이다. 결국 인류는 자연과 생명을 죽이는 '핵=죽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는 '인류'도 포함된다. 이로써 인류는 인류와 인류 자신을 지켜주는 자연 모두를 죽이는 '죽음의 물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보호자를 죽이는 '핵'을 만들어낸 인류. '욕심 많고 어리석은 존재'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 원폭을 개발한 어리석은 자 … 미국?= 아마도 이 같은 이해가 구로사와 감독에 대한 주류 해석이 될 것이다. 여기서 구로사와 감독의 자연주의 및 생명주의와 연결된다. 7화 '귀곡'에 등장하는 늙은 귀신의 말에서 구로사와 감독의 자연 및 생명주의 철학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귀신은 "이것이 자연과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욕심 많은 인간들의 숙명(これが自然と生命を守らない欲張りな 人間達の因果)"이라고 말한다. 영화 <꿈>이 구로사와 감독 말년의 자연주의ㆍ생명주의 사상을 드러내 준다는 해석의 근거가 된다. 마지막 에피소드 8화 '물레방아 있는 마을'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며 영화의 끝을 맺는다.

하지만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다. '핵을 만든 인간'은 '인류 전체'가 아닌 '구체적인 인간'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핵을 만든 '구체적인 인간'은 누구일까?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인간들. 모두 아는 것과 같다. 최초의 핵무기는 미국이 만들었다. 1943년 버클리 대학 교수인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가 이끄는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2년 뒤인 1945년 7월 실험에 성공했다. '핵을 만든 인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정시킨다면 바로 미국 정부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논리가 묘해진다. '핵무기를 개발한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인간'은 미국, 미국 정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되는 것이다. 원폭으로 자연이 망가지고 생명이 사라지고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 책임은 올곧이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다. 인류는 이미 원폭을 경험했다. 그저 실험실에서만 끝났던 일이 아니다. 누가 겪었나. 일본이, 히로시마가, 그리고 나가사키가 그 무자비한 위력을 경험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 개봉작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시각에서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 개봉작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시각에서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을 그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논리의 진전이 일어날 수 있다. '미국 등 핵 개발자'는 '핵을 만든 어리석은 인류'의 대표자가 될 수 있으며 '일본 등 피폭자'는 '핵으로 피해를 본 불쌍한 인류'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이로써 '미국=가해자', '일본=피해자' 논리가 성립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빠진 게 있다. ①미국의 핵 개발 이유, ②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 사용 이유, ③일본에 의해 피해를 본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그것이다. 결국 '잘못'에 대한 '반성'은 없고 '피해'에 대한 '하소연'만 있는 꼴이다.

지금까지 얘기됐던 영화 두 편, 즉 <산 자의 기록>과 <꿈>에서 우리는 구로사와 감독의 원폭 인식을 알 수 있다. 핵의 개발 및 사용에 대한 '인과관계'는 빠지고 '현상'에 매몰돼 있는 것이다. 미국은 왜 핵폭탄을 개발했는가? 핵폭탄 개발 이론은 미국보다 독일이 먼저 시작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독일 출신 물리학자들이 이를 아인슈타인에 알렸고 아인슈타인이 이 내용을 미국 정부에 알려줬던 것이다. 미국은 결국 핵개발에 나섰고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위기도 있었다. 히틀러가 죽고 독일이 항복해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계속됐다. 아직 일본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국민 모두 죽겠다"는 각오로 '1억 옥쇄(玉碎)'을 외치며 강렬한 저항전을 펼치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됐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원폭을 쓰기 전 여러 차례 일본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한다. 원폭투하 결정은, 피해를 줄이고 싶었던 미국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과정 또한 영화로 나와 있다. <킬링 필드>(1984)와 <미션>(1986)으로 명성을 떨친 롤랑 조페(Roland Joffe) 감독의 1989년 작 <멸망의 창조(The Fat Man And Little Boy)>를 보라. 독일의 패전으로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뻔 했으나 일본 때문에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개발자들이 원폭의 위험성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의 불가피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올해, 2023년 8월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또한 이 과정을 잘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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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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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2024-02-19 07:09:25
우와 이런 표현도 가능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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