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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⑰구로사와 감독의 원폭인식(2)'인류의 공포'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⑰구로사와 감독의 원폭인식(2)'인류의 공포'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12.1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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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 자의 기록'은 공포감을 현실감 있게, 또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 얻어
핵을 만든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에 대한 '증오' 녹이며 '바보같은 물건'이라고 결론

1990년, 여든 노구(老軀)의 구로사와 감독은 영화 <꿈>을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원폭 문제를 다룬다. 1955년 영화 <산 자의 기록> 이후 35년 만이다. 이 기간 동안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감독의 시각에는 변화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변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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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1955년 작 <산 자의 기록(生きものの記録)>.

필자는 이 영화를 통해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감독의 1단계 인식이 '공포' 그 자체에 있음을 강조했다.

공포의 원인?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가정법원의 자문위원들은 주인공 나카지마 기이치(中島喜一)의 개인 경험에서 이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 히로시마(広島)에 대한 얘기 역시 스쳐 지나듯 언급될 뿐이다. 그러니 관객은 이와 관련된 주인공의 경험 유무 역시 알 길이 없다. 결국 <산 자의 기록>은 '공포에 대한 묘사'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주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린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그리고 9일 나가사키에 터진 두 발의 원폭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외쳤다. 그리고 5년 뒤 한국전쟁이 터졌고 칼날 같은 냉전의 분위기에서 미국과 소련 간 핵무기 경쟁이 본격 시작됐다. 1953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리에 마치자 미국도 1954년 수차례 수소폭탄 실험을 강행, 세계는 핵에 의한 공포 분위기에 휩쓸리게 된다. 그 유명한 '비키니 섬 원폭 실험'도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 역시 '가공할만한(恐するべき) 수폭(水爆)의 실상(實相)'이라는 신문 기사를 본다.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묘사다.

비키니섬에서의 원자폭탄 실험 장면.
비키니섬에서의 원자폭탄 실험 장면.

구로사와 감독의 '산 자의 기록'은 이 같은 분위기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공포를 현실감 있게, 또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아가 이 '공포'가 일본인이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은 역사 상 유일하게 핵폭탄을 맞은 '인류'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표현하는 핵에 대한 '공포'와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영화의 주제가 이 같은 '공포'에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영어 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으로는, 원 제목의 영어 번역어 <Record Of A Living Being> 외에 <난 공포 속에 산다(I live in Fear)>가 있다.

■ '바보 같은 자'는 원폭 자체인가 개발자인가

'산 자의 기록'이 발표되고 35년이 지난 1990년. 구로사와 감독은 원폭에 대한 새 영화 한 편을 공개한다. 그의 나이 80에 발표한 작품 '꿈'(夢)이다. 세계적인 거장이 직접 각본까지 썼지만 제작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는 많은 제작비로 정평이 나 있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는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다. 영화는 결국 미국 제작사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Inc)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의 광팬이자 그를 롤 모델로 삼는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도움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우선 영화 <꿈>에 대한 내용 전반을 알아보자. 영화는 총 8개의 에피소드로 만들어졌다.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➀여우비(日照り雨), ➁복숭아밭(桃畑), ➂눈보라(雪あらし), ➃터널(トンネル), ➄까마귀(鴉), ➅붉은 후지산(赤富士), ➆귀곡(鬼哭), ➇수차가 있는 마을(水車のある村) 등이다. 모든 에피소드 앞에는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따라서 각 에피소드는 하나의 '꿈'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꿈'의 주인공은 구로사와 감독일까? 그렇다는 해석도, 그렇지 않다는 해석도 모두 가능해 보인다.

구로사와 감독과 이 영화 <꿈>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영화의 공식 트레일러(Trailer)에 잘 드러나 있다. 이 트레일러는 감독에 대한 끝없는 찬사와 함께 영화 <꿈>을 소개한다. 이 영화 <꿈>은 감독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그렸다는 점, 그리고 영화계 한 천재가 인류를 위해 전해주는 '꿈'이란 점을 강조한다.

"50년 이상 그의 영화적 천재성은 전 세계 관객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프란시스 코폴라(Francis Coppola),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등 많은 영화인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또한, (베니스, 칸, 오스카 등) 모든 주요 국제 영화상을 휩쓸었습니다.

지금 그는 우리에게 그의 가장 독특(unique)하고 개인적인(personal) 비전을 전해줍니다. 그의 꿈들, 어린아이로서 또 어른으로서 꾸는,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꾸는,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에 꾸는 꿈들을. 또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해 한 개인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생각을 전해줍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들, 모든 꿈꾸는 자들을 위한 한 인간의 꿈들을."

영화 <꿈>의 8개 에피소드 중 원폭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제6화 붉은 후지산, 그리고 제7화 귀곡(鬼哭) 등 모두 2개다.

수소폭탄 폭발 이후 뿔이 난 사내와 돌연변이 꽃들이 등장하는 영화 '꿈'의 한 장면.
수소폭탄 폭발 이후 뿔이 난 사내와 돌연변이 꽃들이 등장하는 영화 '꿈'의 한 장면.

우선 '붉은 후지산'을 보자. 이야기는 후지산 인근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에서 시작한다. 패닉에 빠진 시민이 우왕좌왕한다. 절벽 앞에 있는 5명의 사람들. 젊은 청년,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여성, 그리고 중년의 핵 전문가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는 청년, 바다 속 돌고래를 부러워하는 여성. 하지만 핵전문가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 외친다. 방사선, 플루토늄, 스트론튬, 세슘의 폐해에 대해 설명하고는 "발전소가 폭발한 이상 돌고래도 인간도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귀곡' 역시 핵 문제를 다룬다. 핵에 의해 파괴된 세상. 도시의 건물은 모두 쓰러져 있고 식물과 동물은 돌연변이 괴물로 변해 있다. 인간도 머리에 뿔이 난 채 바닥에 뒹굴며 고통에 절규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귀곡'을 '붉은 후지산'에 연결된 이야기로 해석한다. 하지만 아니다. '붉은 후지산'이 핵발전소의 폭발에 대한 것인 반면 '귀곡'은 원자폭탄, 정확히 말하면 수소폭탄이 터진 뒤 이야기다. 이야기 속 한 귀신(鬼, おに)은 "옛날에는 이곳은 꽃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곳이었지"라고 회상하며 "그런데 그놈의 수소폭탄, 그놈의 미사일이 이곳을 사막으로 만들고 말았어"라고 말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럼에도 제6화와 제7화를 관통하는 관점이 있다. '핵을 만든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에 대한 증오'다. '붉은 후지산'에 등장하는 핵 전문가는 핵의 폐해를 설명한 뒤 "핵을 만든 인간의 어리석음은 놀라울 정도"라며 절규한다. '귀곡'에 등장하는 막 뿔이 나기 시작한 한 귀신도 "어리석은 인간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며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또 그 귀신은 "이것이 자연과 생명을 지키지 않는 욕심 많은 인간들의 업보"라는 말도 한다. '핵을 만든 인간은 어리석고 욕심이 많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 안에는 '핵을 만든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담겨 있다.

이는 확실히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감독의 새로운 인식이다. 1955년 작 <산 자의 기록>에는 이 같은 인식이 없다. 원자폭탄 개발자에 대한 언급도, 그에 대한 비판도 없다. 물론 <산 자의 기록>에도 '바보 같은' '어리석은' '멍청한'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매우 흥미롭다. 이 표현의 대상은 영화 <꿈>에서처럼 '인류' 또는 '인간'이 아닌 탓이다. <산 자의 기록>에서 표현되는 '바보 같은' 것은 바로 핵폭탄 그 자체인 것이다. 주인공 나카지마는 신문을 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누가 이 '바보 같은 것(馬鹿のもの)'을 만들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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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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