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0:35 (토)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국가부도의 날㊦ 세계화의 후폭풍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국가부도의 날㊦ 세계화의 후폭풍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09.11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코미디같은 발상에 '엄청난 비극' 잉태 … 준비되지 않은 개방정책이 禍 키워
3低호황 끝물에 대기업은 외화 유입 창구인 종금사 설립해 경쟁적 투자나서

사실에 대한 과하고 고의적인 불일치, 그리고 진부하게 느껴질 만큼 익숙한 내러티브 구조.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갖는 두 가지 아쉬운 점이다.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는 좀 더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었을 것 같고, 내러티브 구조 역시 변형을 줄 수도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진짜 아쉬운 것은 따로 있다. 날카로운 역사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 끔찍한 외환위기를 맞아야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그에 대한 특별한 역사 '해석'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동아일보 1994년 11월 18일자 기사. ‘시드니 구상’으로도㊦ 잘 알려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 첫걸음을 알리고 있다.
동아일보 1994년 11월 18일자 기사. '시드니 구상'으로도㊦ 잘 알려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 첫걸음을 알리고 있다.

후세 학자나 전문가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위기가 줬던 충격만큼이나 많고 다양할 것이다. 1998년 초 감사원이 낸 보고서를 필두로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국 경제의 내부 문제가 첫째로, 여기에는 정실자본주의나 기업ㆍ금융의 취약점 등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둘째로는 외부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려는 것으로,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확장, 국제 헤지펀드의 급격한 움직임 등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어디까지나 사회 또는 경제의 '구조'나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도 있다. 위기의 원인을 특정 인물의 성향에서 찾으려는 시각이다. 이들은 리더, 리더십, 그것도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의 리더십이 외환위기의 주요 동인(動因)으로 작동했다고 본다. 역사가나 학자들은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개인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은 역사의 구조나 도도한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하지만 다수가 늘 옳은 것만은 아니다.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성향은 얼마든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결과론인지는 몰라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특성을 보면 이 같은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평생 독재와 싸운 경력은 국민의 존경을 받을 만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한계를 갖는다는 해석이 많다. 정치적 감(感)에 의한 정책 결정, 대중과 언론에 대한 지나친 자기 과시, 투쟁 일변도의 삶의 결과인 전문성 결여와 독서력 부재, 10분 이상 토론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신문조차 요약해 보고해야 하는 지적 무능, 그럼에도 '머리는 빌려 쓰면 된다'는 식의 오만....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의 무능 아래 정부 정책의 오류는 필연일 것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외환위기를 심도 있게 분석한 『월간조선』 1998년 3ㆍ4월호 기사는 이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팀의 보고에 대해 어떤 본질적인 질문이나 의견, 토론이 없었다"고 쓴 취재 기자는 '정치적 불구'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대통령 개인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위기 상황에서도 "진지한 고뇌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대통령의 리더십과 외환위기는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이를 비껴갔다. 대통령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춰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몇몇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입부에서 이 장면들을 압축해 보여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장면 #1❙ 대통령 전용기 내 수행비서관회의(오전)

<자막> 1994년 11월 16일.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다음 행선지인 호주 시드니를 향하고 있었다.

▶ 대통령 : 내일 아침 기자간담회가 있어요, 기사거리가 있어야 할 텐데....

(비서진들 침묵)

▶ 외교안보수석 : 별 뉴스가 없는데요.... 그냥 편히 쉬어 가시면 어떨까요....

▶ 대통령 : 아니지, 아니지, 뭔가 있어야지, 참, 경제수석, 어제 얘기했던, 그 뭐야 '세계화'인가 하는 거 있잖아요, 그걸로 자료 한 번 만들어 보세요.

▶ 경제수석 : 예, 알겠습니다.

❙장면 #2❙ 호주 시드니 한 호텔방(새벽)

(새벽 2시)

경제수석이 끙끙거리며 '대통령각하 말씀 자료'를 만든다.

❙장면 #3❙ 조찬 겸 기자 간담회장(아침)

<자막> 1994년 11월 17일. 호주 시드니 한 호텔에서 개최된 조찬 기자 간담회장

▶ 대통령 : 기자 여러분, 기사거리가 있으면 싶죠? 그래서 하나 만들어 왔어요. 이번 동남아 및 대양주 순방을 하면서 한 가지 구상을 했는데요,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서 세계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이 세계화 정책을 구체화해서 장기적으로 추진해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기자들, 어리둥절해 한다.)

▶ 기자 1 : 말씀하신 세계화는 기존의 국제화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대통령이 당황하는 표정을 보이자 경제수석이 나선다.)

▶ 경제수석 : 그 대답은 제가 하지요. 국제화가, 세계의 개방화 추세에 뒤져서는 안 된다는 다소 수동적인 의미라면, 세계화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앞서 나아가자는 것으로서, 국제화에 비해 한결 진취적인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시드니 구상'의 탄생 과정이다. 커다란 바위덩이처럼 한 시대를 짓눌렀던 '세계화'라는 말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환경에서 태어나 국민 앞에 막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화'는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였다. 몇몇 전문가 빼고는, 정부 내에서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국 전까지 '세계화'라는 단어는 언급된 적이 없었다"며 "그 말을 전해 듣고 몹시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이 용어를 처음 들은 것은 기자간담회 전날 보고르에서 자카르타로 이동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안에서 한이헌 경제수석이 이 '세계화'라는 단어를 처음 썼고, 대통령은 새롭고 참신한 이 단어에 귀가 솔깃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참신하다 해서 뜻도 제대로 모르고 함부로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 정부는 한때 '세계화'의 영문 표기를 '한국형 국제화'라는 뜻으로 'Segyehwa'라 쓰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코미디였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중소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중소기업들이 돈을 못받은 부도어음이 쌓였다. 사진은 중소기업기념관에 보관중인 실제 부도어음이다/고윤희 이코코텔링 기자 촬영.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중소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중소기업들이 돈을 못받은 부도어음이 쌓였다. 사진은 중소기업기념관에 보관중인 실제 부도어음이다/고윤희 이코코텔링 기자 촬영.

그러나 이 코미디는 엄청난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 코미디는 실제 국가정책에 반영됐고, 심각한 혼선을 빚었으며, 왜곡된 경제정책을 펴게 됐고, 결국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한 해 전만 해도 대통령은 국제화를 내세웠다. 많은 이에게 "이제 우리는 문을 열고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외쳤다. 1994년 한 해 내내 국정 전반에 '국제화'의 바람이 불었다. 국무총리실에는 국제화추진위원회가, 경제기획원에는 경제국제화기획단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대통령이 갑자기 '세계화'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혼선은 불가피했다.

당시 세계는 말 그대로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기'였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체제 붕괴에 이어 1990년대 초 찾아든 불황으로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1993년 12월 15일 우루과이 라운드(UR)협상이 타결됨으로써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체제가 무너졌다. 나아가 1994년 4월 15일에는 125개 나라가 '국제무역기구(WTO)'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1995년, 이제 세계는 WTO의 시대를 맞게 됐다.

정부는 '세계화'를 '적극적인 국제화'로 받아들였다. '국제화를 세게 하면 세계화'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그러니 정부는 국내 개혁ㆍ개방 정책을 더 빨리, 그리고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했다. '시드니 구상' 2주 뒤인 12월 1일 당정위원회는 경제ㆍ행정ㆍ교육ㆍ문화ㆍ한국의 위상 등 5대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다. 23일에는 세계화를 중심의 새 내각이 들어섰고, 27일 국무회의에서는 '세계화추진위원회' 구성을 위한 규정안을 의결했다. 그리고 이들의 정책 포커스는 모두 2016년을 목표로 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맞춰져 있었다.

이제 한국의 실질적인 대외 경제정책이 극심한 변화를 겪을 차례였다. 1994년 11월 환율의 일일변동폭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외환시장 선진화 방향이 시행된데 이어, 12월에는 외환제도의 전면적인 자유화 및 선진화를 우한 외환제도 개혁 최종안이 확정ㆍ발표됐다. 이로써 1994~97년 동안 외국인의 국내 주식 소유한도 확대, 변동환율제 도입, 달러 송금 자유화, 외국인 직접투자 확대 등 대대적인 조처가 연달아 취해졌다.

영화 속 주인공 윤정학 과장이 다녔던 회사가 '종금사'로 불리던 '종합금융회사(Merchant Banking)였다는 점에는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하다. 종금사는 당시 외환위기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기업들은 각자 종금사 하나씩을 끼고 해외에서 거대 자본을 끌어다 썼고 이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tkwlstjfaud
1994년부터 단기외채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그만큼 외환관리가 불안정해졌다.

이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상황을 보자. 1990년대 초ㆍ중반은 이른바 '3저 호황'의 끝물이었다.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투자에 나섰고 돈, 그것도 외국 돈이 필요했다. 국내 대출 금리가 15%를 넘나들던 반면 달러 차입 금리는 8%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기업들은 잘 나가고 있었다. 외국 은행들도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주려 했다. 기업이 스스로 종금사를 세워 해외자본을 끌어오겠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여기에 규제일변도였던 정부정책도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능동적인 국제화'라는 '세계화 정책'을 펼쳐야 하지 않는가. 정부의 종금사 정책은 '시드니 선언' 이후 빠르게 변했고 마침내 규제는 해체됐다. 주요 기업들은 저마다 꿈에 그리던 종금사를 갖게 됐고 이로써 1990년대 초반 6개에 불과했던 종금사는 외환위기가 터질 무렵 30여개로 늘어나 있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이 종금사 문제를 꼽는다.

종금사는 해외자금을 융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종금사의 수적 증가는 곧 외채의 증가를 의미했다. 1990년 316억 달러 수준이었던 총외채 규모는 1997년 위기 당시 1200억 달러로 약 3.8배 증가했다. 단기채무의 증가율은 더욱 가팔라서 1990년 143억 달러에서 1996년 610억 달러로 4.3배나 늘었다. 단기 채무는 위기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국내 시설의 중복ㆍ과잉투자를 부추겨 기업도산의 원인이 됐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남아 외환위기로 아시아 전체가 위험해지자 채권국이 채권연장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위기의 기폭제가 됐다.

준비되지 않은 개혁ㆍ개방 정책의 급격한 추진은 결국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해일을 불러들였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는 이후 회고록에서 정부 및 경제관료를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했다. 1998년 2월에 작성된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보고서 역시 "세계화의 추진 결과 실력과 국내체제는 갖추지 않은 채 개방만 가속화 됐다"라고 썼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을 때나 120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 때나 뭐가 달라졌는지 의구심이 생기는 대목이다.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식민과 제국의 길』,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