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7:00 (목)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국가부도의 날㊤ 'IMF'의 그림자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국가부도의 날㊤ 'IMF'의 그림자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09.09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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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을 틈타 부동산을 매집해 떼 돈을 번 윤정학과장(유아인 분)의 탐욕에 눈길
위기경보 울린 보고서는 한국은행이 아닌 재경원서 작성… 사실과 허구 뒤섞여

세계경제에 공포의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엇을 해야 하나.... 다시 역사책을 뒤적거리게 되는 이유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는 대공황에서, 누구는 오일쇼크에서, 누구는 플라자합의에서, 누구는 IMF 외환 위기에서, 누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웬만한 식견 없이 경제사를 뒤적거릴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교재'로 끼어든다. 영화를 통해서라면 경제와 역사를 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제사를 통한 작금의 상황인식과 대처가 한결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국내외 경제의 역사'를 되들아 보면서 음습한 공포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 기획시리즈를 엮을 이재광 이코노텔링 편집위원(기사 하단 소개)은 IMF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란 책을 펴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편집자주>

국가부도의 날 사진설명 사진설명 사진설명
'국가부도의 날'영화는 사실과 허구가 혼재돼 있다. 사진은 영화 포스터.

미중 무역ㆍ환율전쟁, 한일 무역분쟁,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 사상 최대 가계부채, 무역수지 흑자 규모와 경제 성장률의 지속적 하락, 주가 폭락, 부동산 가격 하락, 사상 최저 출산율과 급증하는 고령자수, 증가일로의 기업 및 자영업 도산….

2019년 하반기 대한민국이 위험해 보인다. 특히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어느 날 갑자기, 그 어떤 재앙이 덮친들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열악하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과 와중에 이뤄진 한국과 일본 간 무역분쟁은 그 전례를 찾기 쉽지 않다. 마침 2019년은 1997년 외환위기 발생 20년,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위기 발생 10년째인 시점이라 '위기의 10년 주기설'이 힘을 얻으며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개봉한지 거의 1년 가까이 지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지금도 여전히 화제가 되는 것도 이 같은 상황 탓일 게다. 특히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인 젊은 샐러리맨 윤정학 과장(유아인 분)에게 눈길을 많이 준다. 나라 경제가 무너지는 위기 상황에서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투자자들을 모아 달러ㆍ주식ㆍ부동산 등을 사 모으더니 결국 떼돈을 벌고 신분 상승에 성공한다. 청년실업이 한창인 요즘 '헬조선'에 고통 받는 이 땅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문신처럼 그의 성공이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외환위기 가능성을 우려한 재경원 극비보고서의 사진. 『바트화와 기아: 상이한 문제인가』를 다룬 (월간조선) 1998년 3ㆍ4월호 기사 보도내용 일부.
외환위기 가능성을 우려한 재경원 극비보고서를 월간 조선은 보도했다. 사진은 이 보도 내용이 들어간 월간조선의 『바트화와 기아: 상이한 문제인가』 란 제하의 기사를 촬영한 것이다.(월간조선 1998년 3ㆍ4월호)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2018년 11월 28일 개봉해 375만 명 관객을 끌어 모았다.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은 되는 흥행실적을 올린 셈이다. 2016년 <스플릿>(관객 수 76만 명)으로 장편영화계에 처음 이름을 알린 최국희 감독은 두 번째 영화 <국가부도의 날>로 첫 번째 영화의 흥행실패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①국내 최고 수준의 흥행 배우 영입, ②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③경제위기를 우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 비결을 찾는다.

통칭하여 'IMF 위기'로 불리는 '1997년 외환위기'는 파급효과가 정말 컸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사는 성인 남녀 중 이 '대사건'과 관련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도산과 실업의 당사자이며, 누군가는 그들의 가족일 것이다. 소수이기는 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횡재'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50대 후반인 필자도 당연히 그중 하나로, 영화의 개봉 소식과 함께 아직 치유되지 못한 국가적 차원의 상처를 어떻게 그려냈을 지가 몹시 궁금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부분 또한 없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역사영화'로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훨씬 더 큰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말과 영상과 소리와 음악이 하나가 된 '영화언어'라는 용어가 있다. 포스트모던 역사가 로버트 로젠스톤(Robert Rosenstone)은 이 '영화언어'로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 역사 기술 및 분석 방법으로서 영화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실망스러웠다'는 평가는 아마도 이 '가능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우선 역사적 사실부터 집고 넘어가 보자. 한국은행의 수장(首長)을 '총재'가 아닌 '총장'으로 부르는 것에서부터 영화의 역사적 사실은 기대할 것이 못 됐다. '총재'와 '총장'을 구분하지 못한 시나리오 작가의 '무지(無知)'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놓고 '총재'를 '총장'으로 부르는 의도에서 영화의 고의적인 '역사왜곡' 속내를 알아차린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재정국 차관'이라는 용법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럼에도 '동남아 외환위기'를 때로 '동아시아 경제위기'로 부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같은 '의도'로 인해, 어쨌거나, 이 영화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을 애써 찾아내고 또 그 '왜곡'을 애써 비판하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늘 역사에 대한 관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리고 그 같은 이유에서 관객 또한 '사실'에 대한 이해를 원한다. 그러니, 별 의미는 없다 해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실제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①외환위기에 대한 비밀보고서를 낸 기관은 한은이 아닌 재경원이었다. 보고서의 제목도 『외환위기와 한국경제』라는, 영화 속 그것처럼 밍밍하지 않다. 『바트화와 기아: 상이한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이론적 관점에서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시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기업 도산 등에 따른 은행의 위기)는 서로 관련이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기아 등 기업 도산과 그로 인한 금융위기가 외환위기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분석은 이 같은 시각에서 제기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현실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금융위기가 외환위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태국의 바트화 폭락이 동남아 외환위기를 촉발한 것처럼, 기아의 도산은, 은행에만 영향을 주는 단순한 금융위기에서 멈추지 않고, 불안감으로 국내 외화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등 외환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가 발행된 시점 또한 영화에서처럼 11월 초가 아닌 7월 23일이었다.

②영화에서는, 당시 재경원을 연상시키는 재경국에서 IMF 행을 주장하고, 한은에서는 끝까지 이를 반대한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는 이 역시 다르다. 재경원도 한은도 모두 IMF 행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에 대한 차이만 있었을 뿐인데, 이 역시 한은이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영화 내용과는 반대다.

③더 중요한 것은, 영화 속 한은 주장처럼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 채무불이행(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오해'다. 영화는 마치 이 말이 정답인양 얘기하고 있지만, 이는 진짜 잘못됐다. 모라토리엄 선언 시 해외투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 뱅크런에 금융기관 도산 등 자칫 경제에 돌이키기 어려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④사실과 다른 점은 그밖에도 많다. 대우그룹의 위기는 영화와는 달리 외환위기 초입이 아닌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일이었다는 점(대우는 외환위기 직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오히려 외형을 불려나갔다)이나 자산유동화증권(ABS, Asset Backed Securities) 발행을 통해 긴급 자금을 확보해 급한 불을 끄고 추후 일본 등 해외에서 돈을 빌려오자는 아이디어도 재경원의 아이디어였다는 점 등도 사실과 다르다. 무엇보다 한은의 일개 팀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한은 총재, 경제 담당 차관 등과 어깨를 견준다는 설정은 아무리 영화라 해도 조금 지나친 감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담당 부서나 수장의 호칭까지 바꿔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니 누구도 이 영화에 대해 '사실 왜곡' 등등을 얘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로써 영화는 큰 강점을 하나 갖게 되는데, 바로 명예훼손에 대한 것이다. 외환위기는 고작 20년 남짓 된 사건이다. 대통령은 고인이 됐어도 당시 관계자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중에 대한 영화의 파급력은 크다. 의도적이든 실수든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가만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은 영화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다. 임상수 감독의 2005년 개봉작 <그때 그 사람들>을 보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녀들이 영화가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해배상과 영화상영금지 청구를 냈다. 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줬고 영화사는 결국 배상은 물론 '주요 장면 삭제'라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국가부도의 날>이 보여주는 '의도된 역사왜곡'은 원하지 않는 소송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을 것으로 추론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자산유동화증권(ABS, Asset Backed Securities)= 부동산이나 부실채권 등의 자산은 매매가 쉽지 않다. 이른바 '비유동성 자산'이다. 하지만 금융의 귀재들은 이들을 쉽게 매매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부동산을 담보로 채권을 만든 뒤 유량 및 비우량 채권을 뒤섞은 '자산담보부증권(ABS)'이라는 새로운 증권을 개발해낸 것이다. ABS는 말 그대로 '비유동성자산'을 '유동성자산'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ABS는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다.<'국가부도의 날'은 세번에 나눠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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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식민과 제국의 길』,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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