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가을, 현대 농구단서 이제 막 농구 걸음마를 뗀 이봉걸을 데리고 日서 스미토모와 정기전
상대 장신선수 오카야마 막지 못하고 백코트 늦어 무용지물… 상대진영 머물다 우연히 골밑슛

1979년 7월, 국내 언론은 '인간 기중기의 농구 외도'라는 제목으로 이봉걸의 농구 전향을 화제로 보도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이봉걸은 "평소 농구에 특별한 매력을 느껴왔는데 종별농구 선수권대회를 보고 전향할 뜻을 굳혔다. 농구야말로 내가 개척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스포츠"라고 말했다.

현대 농구단의 방열 코치는 "이봉걸이 농구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농구선수가 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테스트해보겠다. 소질이 나타나면 대선수로 키워보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장신센터의 필요성을 느낀 정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현대 씨름단이나 한국 씨름계는 물론 이봉걸 본인조차도 얼마나 당황하고, 황당했을까.
이날부터 '이봉걸 센터 만들기'프로젝트가 가동됐다. 방열 코치는 이봉걸에게 농구의 기본기부터 가르쳐야 했다.
79년 가을, 현대 농구단은 이제 막 농구 걸음마를 뗀 이봉걸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스미토모와 정기전을 펼쳤다. 이봉걸이 오카야마를 어느 정도 막아줄 것을 기대했지만 문제는 달리기였다. 씨름의 달리기와 농구의 달리기는 완전히 다르다. 농구는 다섯 명 전원이 공격하고, 수비해야 하는데 이봉걸은 백코트가 전혀 되지 않았다.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마치 4명이 상대 5명과 싸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경기에서 이봉걸이 첫 득점을 했다. 수비 리바운드를 잡은 신선우가 백코트를 하지 못하고 상대 진영에서 어슬렁거리던 이봉걸에게 공을 던져줬고,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골밑슛으로 득점을 한 것이다. 이봉걸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이봉걸은 결국 농구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음 해 씨름으로 복귀했다. '이봉걸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으나 여기에서도 정주영 회장의 기발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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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