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최종건은 통솔력과 추진력, 사교 능력이 월등했고, 동생 최종현은 조직력과 계획성이 치밀해
선경직물 인수후 자금압박에 고민하는 형을 보고 美유학 자금 형 사업에 보태라고 아버지 설득
1971년 선경직물 사장 맡아 흑자로 전환시켰고 수출 성과도 올려 형에 이어 금탑산업훈장 받아
평생 개인 소유의 집을 갖지 않아 … 워커힐 호텔 빌라촌의 50평 남짓 중간 크기 규모서 주거해
1998년 폐암으로 타계…국토가 분묘로 뒤덮인 것을 개탄해 '화장'(火葬) 유언해 화장운동 점화

최종현 선대회장은 1929년 11월 21일 경기 수원시 평동 7번지에서 4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아버지가 농사짓는 방식이나 어머니가 2층밥을 만드는 이유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농사에서는 물 대는 방식을 바꿔 수확량을 늘렸고, 밥 지을 때는 뜸들일 무렵 장작 일부를 빼내어 타지 않게 하는 등 해결 방법을 찾아내었다.
어른들은 처음에는 "어린 것이 뭘 안다고!"라며 혼내기 일쑤였지만, 결국 그의 총명함에 감탄하곤 했다.
형제의 성격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려서 개구쟁이에 지는 것을 싫어해 골목대장 노릇을 한 것은 같지만, 형은 일을 저지르고 벌이는 데 반해 동생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편이었다. 형은 한 가지에 몰두하면 학교도 잊을 정도로 깊이 빠졌지만, 동생은 신나게 놀다가도 때가 되면 곧바로 공부에 열중했다. 성인이 되어 형은 통솔력과 추진력, 사교 능력이 월등했고, 동생은 조직력과 계획성에서 형을 앞섰다. 그래서 형제는 어떤 일에나 손발이 잘 맞았고 우애 또한 각별했다.

수원 농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농화학과에 입학한 최종현 회장은 3학년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선경직물을 갓 인수하고 자금 압박에 고민하는 형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항상 존경하고 따르던 형의 사업은 남의 일이아니었다. 그는 미국 유학의 꿈을 잠시 멈추고 아버지를 설득해 유학 자금을 형의 사업에 보탰다. 최종건 회장은 기계가 돌고 자금이 회전하면서 가장 먼저 동생 유학 자금부터 따로 챙길 만큼 동생에게 마음을 다했다. 또한 1년 후 최종현 회장이 유학길에 오른 이후 한 번도 송금을 거르지 않았다.
최종현 회장은 영어 성 표기를 'Choi'가 아니라 'Chey'라고 썼다. 그는 유학에 앞서 수원 미군부대에서 영어를 익힐 겸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한 미군 대위에게 "어떤 철자를 써야 '최'에 가장 가까운 발음이 되느냐?"라고 물어 얻은 결론이 'Chey'였다. 그는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위스콘신대학교 화학과 3학년에 편입한 최종현 회장은 졸업 후 1956년 시카고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곳에서 지인으로부터 응용미술을 공부하던 유학생 박계희 여사를 소개받고 첫눈에 반한다. 매사에 명쾌한 해답을 좋아한 그는 곧바로 자신의 감정을 알리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겠다고 밝혔다.
반면 우선 사귀며 서로를 알고 나서 결혼을 생각하고자 했던 박계희 여사는 한동안 최종현 회장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두 사람은 1년여의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무뚝뚝하고 소탈한 최종현 회장과 조용하고 인자한 성품의 박계희 여사는 평생 좋은 금실을 자랑하며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대기업 회장 부인임에도 평생 사치를 멀리한 박계희 여사는 남편을 내조하며 1984년 개관한 위커힐 미술관 운영에 매진했다. 그녀는 1997년 6월 최종현 회장이 폐암 수술을 마친 날 밤, 남편을 위로한 뒤 숙소로 돌아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퇴원 직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최종현 회장은 창자가 끊어지는 것같이 통곡했고, 1년 후 아내 곁으로 떠났다.
최종현 회장은 1962년 10월 부친 최학배 공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해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했다. 아직 공부에 미련이 남았으나 갑자기 성장한 회사가 자금 사정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고 먼저 형을 도와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에게 회사가 망하는 것은 형이 망하는 것이며, 장남인 형이 망한다는 것은 곧 한 집안이 망하는 것이었다.

치밀한 기획력과 지성을 갖춘 최종현 회장의 등장은 경영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최종현 회장은 형이 타계할 때까지 든든한 조력자로서 그룹 발전을 견인했다. 정부의 수출장려정책을 이용해서 차관을 도입해 악성 부채를 일시 해결한 것을 시작으로, 원사 직수입을 추진하고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건립을 계획하는 등 이른바 '쌍두마차' 경영시대를 열었다.
특히 1966년부터 최종건 회장과 함께 '선경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선경을 국내 최대의 섬유 종합 기업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1년 선경직물 사장을 맡아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통해 적자에 시달리던 기업을 흑자로 전환시켰다. 최종현 회장은 1973년 11월 국내외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수출에 진력한 성과를 인정받아 경제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는다. 이는 형 최종건 회장에 이은 수훈으로 의미를 더했다.
최종건 회장이 병들자 최종현 회장은 매일같이 형님 댁을 찾아 문병했다. 임종이 다가온 최종건 회장은 동생 손을 잡고 "뒤를 잘 부탁한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최종현 회장은 형의 당부를 단순히 회사를 잘 이끌어나가 달라는 뜻으로만 듣지 않았다. "나는 3남매의 아버지가 아니라 형님네의 7남매를 합친 10남매의 가장"이라고 가슴에 새겼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서울경제 신문 '형제'라는 기고에 "형님이 살아계실 때 이상으로 잘해야 한다."라는 다짐을 통해 그가 느낀 책임감의 무게를 표현했다.
최종현 회장은 직원의 능력과 인격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취임 후부터 계열사 사장에게 결재권을 위임하며 서류에 회장 결재란을 두지 않았고, 1970년대 말에는 출퇴근 카드도 없앴다. 한편 "일을 맡기지 않으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한다."라는 철학을 가졌던 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업 환경 변화에 따라 과학적이고 현실에 맞는 경영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4년여의 연구 끝에 1979년 선경경영관리체계인SKMS(SK Management System)를 완성해 전 직원이 공유토록 했다. 이처럼 그는 혁신적인 경영 시스템으로 SK의 기업 문화를 바꾸어 나갔다.
최종현 회장은 유학 시절 미국의 거대한 숲을 보며 우리나라의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어 30년 후에는 그 수입으로 세계적인 석학을 양성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울창한 산으로 지역 주민을 살리고 인재를 키워 나라를 살려 녹색 공헌과 인재 양성을 이룬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1972년 설립한 서해개발(現 SK임업)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기업 임업이다. 현재 SK임업이 가꾼 민둥산들은 서울 남산 40배 면적인 4,500헥타르에 400만 그루의 숲을 이뤘다. 2006년 산림청이 제정한 '대한민국 녹색대상'의 초대 수상자는 故 최종현 회장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10년 후를 생각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 첫 번째 결실은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였다. 1973년부터 수직계열화를 목표로 석유화학 사업을 준비하고 지속적으로 '석유 외교'를 펼쳐온 결과였다. 유공 인수 후 회의 석상에서 한 직원이 다음 신규 사업을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반도체와 이동통신이다."라고 밝혔다. 그의 시계는 언제나 남보다 10년을 앞섰다.
최종현 회장은 사람을 가장 중시했다. 회사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으며 사원 관리를 최우선했다.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친 프로젝트의 브리핑 자리에서도 잔뜩 주눅 들어 있는 책임자에게 그는 화를 내기는 커녕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유공 인수 때도, 한국이동통신 인수 때도 그는 해고 없이 재교육을 통해 모두를 SK 가족으로 만들었다. 사람 위주의 경영 철학은 노사 갈등 없는 기업을 이끄는 비결이기도 했다. "나는 임직원의 삶의 터전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경영에 보탬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이는 유공 임직원과의 첫 만남에서의 첫 일성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평생 개인 소유의 집을 갖지 않고 워커힐호텔의 빌라에서 전세로 살았다. 그것도 50평 남짓의 중간 크기에 주거했다. 치약도 3~4밀리미터만 칫솔에 묻힐 정도로 아껴 썼다. 사무실 역시 '대기업 회장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했다. 그는 항상 "이익 추구는 회사를 위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박계희 여사가 미술관을 설립할 때 내건 첫 번째 조건도 미술품으로 돈 벌겠다는 생각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임원이 "왜 SK는 부동산 사업을 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진정한 기업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고 성취해야지. 가만히 앉아 부풀리기만 하면 안 돼."

1973년 초 MBC가 고교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장학퀴즈>를 기획할 때 최종현 회장은 "열 명 중 한 사람만 봐도 청소년에게 유익하다면 조건 없이 지원해도 좋다."라며 제작비용 일체를 후원했다. 당시 50대 기업에 겨우 들 정도의 중견기업으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제품을 팔기 위해 후원한다는 오해를 받아선 안 된다."라며, "제품 광고 대신 공익 광고를 방영하라."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1년에 두 번 기장원과 월장원 학생들을 본사에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는 등 세심한 관심을 가졌다. "여러분은 졸업하고 선경 오면 안 돼. 더 좋은 데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해야지."라는 말로 주변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인재 양성이라 믿었고, <장학퀴즈> 후원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대한민국이 21세기에 초일류 국가가 되기를 바랐던 최종현 회장은 평생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74년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5년간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해 사재를 들여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조건은 단 하나. 나중에 나라를 위해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출국하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해주는 말은 "마음에 씨앗을 심어라."였다. 나무처럼 끊임없이 삶을 가꾸어 나가라는 것. 그것이 그가 한국고등교육재단 인재들이 갖추길 바라는 진정한 삶의 태도였다.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겪은 후 최종현 회장은 국가의 '에너지 자립' 중요성을 절감하고 유공 인수 후 해외 석유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석유 개발은 막대한 자본이 들고 성공률도 낮아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장사꾼과 기업가의 차이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개인적인 이해보다 나라 경제에 대한 공헌을 우선해야 한다. 우리는 인더스트리얼리스트다." 그의 의지와 결단은 1984년 북 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낸 순간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모든 사람이 매사에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할 수 있는 최대'를 추구하는 SUPEX 개념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까지 적용되어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내고야 말았다. 최종현 회장의 김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고,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SUPEX 김치'를 탄생시켰다. 중동 여성들이 입는 '토브'를 개발할 당시에는 "이론상 검은색의 최고 수준은 어디인가?", "현존하는 가장 검은색은 무엇인가?"로 문제에 접근했다. 이런 SUPEX 추구 과정을 통해 개발한 검은색 직물은 중동 최고의 인기 상품이 되었다.
최종현 회장은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다."라는 철학을 평생 실천한 기업가였다. 형에 이어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그는 1983년 사재를 들여 '수원장수근로회관'을 짓고, 1995년 250억 원을 들여 '수원선경도서관'을 건립하는 등 수원시 발전에 기여했다. 1995년 조성을 약속한 '울산대공원'은 최태원 회장으로 이어져 2006년 결실을 이뤘다. 울산대공원은 전국에서 가장 큰 도심공원이다. 1998년에는 이화여대의 '이화ㆍSK텔레콤관'에 이어, 사비로 KAIST의 'SUPEX경영관'을 건립하는 등 대학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KAIST SUPEX경영관 5층에는 '최종현홀'이라는 강의실이 있다.
1993년 2월 제21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최종현 회장은 그간 명예직으로만 여겨오던 이전 회장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한국 경제를 대표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한시도 쉬지 않았던 그는 'Mr. 국가경쟁력강화'라고 불렸다. 기업 혁신과 재계의 신뢰 회복,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학계와 재계, 정부를 오가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폐암 투병중이던 1997년 가을 산소통과 호흡기를 단 채 청와대를 두 차례나 방문해 대통령에게 경제 위기 대응을 위해 긴급 조치를 내려줄 것을 직언한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그는 "국가를 대표해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경제인은 사업에 앞서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며 세계를 상대해야 하기에 단순한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비즈니스 스테이츠맨'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으며, 그의 이러한 행보는 후대 기업인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최종현 회장은 1998년 8월 26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길도 남달랐다. 이미 1980년대부터 국토가 분묘로 뒤덮인 것을 개탄했던 최종현 회장은 "자신을 화장(火葬)할 것"을 유언했다. 그의 유언은 이행되었고, 감동받은 많은 사회 인사들이 화장 운동에 동참했다. 그의 아름다운 유언은 장례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그가 솔선수범한 화장은 오늘날 보편적인 장례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최종현 회장의 경영 여정=최종현 회장은 20세기 대한민국 경제를 이끈 재계의 거인이었다. 형인 최종건 창업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고 이동통신 사업을 성공시키며 최종건 회장 타계 당시 재계 50위권의 SK를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초석을 마련했다. 특히 SKMS와 SUPEX 추구법 등 그가 도입한 선진적인 경영관리
시스템은 오늘날 SK를 움직이는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유력한 경제인이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 그가 헌신한 다양한 활동은 국가 경제 발전의 유산이 되었고, 무엇보다 30년 앞을 내다보고 평생을 바친 인재 양성의 노력과 조림 사업 등은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최종현 회장의 2남 1녀 가운데 장남 최태원은 SK그룹의 회장으로, 차남 최재원은 수석부회장으로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사촌 형제들과 함께 SK그룹을 오늘날 국내 재계 2위로 성장시키는 데 역할을 다하고 있다. [出典=SK창립70주년 최종건 창업회장ㆍ최종현 선대회장 어록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