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병(請兵)하러 당나라에 간'김춘추 외교'는 1대1 동등 외교완 거리
윗 나라에 간청하여 머리에 쓰는 그 나라 관료의 관(冠)과 옷을 받아
위기 땐 백성이 나라 지켜 … 삼성 등 기업과 K-POP 등이 우리의 힘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한국전쟁으로 멈췄던 외교가 1992년 다시 이어지고, 양국의 경제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중국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국과 중국간 관계가 악화되며 그 사이에 낀 우리나라 입지도 난처해졌다. 그러나 중국과의 이 복잡 미묘한 관계가 새삼스럽지 않다. 한중 관계는 한반도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라고 할 만큼 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이 끼친 영향이 우리 역사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북방을 지키던 시기에는 중국과 여러 차례 '대등한 위치'에서 밀고 밀리는 전쟁도 하였다. 그 대등했던 관계가 신라 28대 진덕여왕 2년(648년) 무너졌다. 청병(請兵)하러 당나라에 간 김춘추가 외교적으로 성공하고 삼국통일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 신라와 당나라간 외교는 1대 1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상하 관계의 위치에서 병력 지원을 받은 것이다.
당시 국가간 외교가 상하 관계로 맺어지면 '옷을 주고받는 것'으로 그들 간의 서열을 확실히 하였다. 두 나라의 옷을 서로 교환한 것이 아니라, 상위(上位) 나라에서 하위(下位) 나라에 옷을 '하사(下賜)'하였다. 이른바 청사관복(請賜冠服) 제도다. 청사관복 제도란 아래 나라에서 윗 나라에 간청하여 머리에 쓰는 그 나라 관료의 관(冠)과 옷을 받아오는 것을 일컫는다. 당시 당나라가 그들의 관복을 신라에 '내려'주었다. 슬프게도, 이렇게 시작된 청사관복 제도는 중국의 역사나 왕조가 바뀌어도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더구나 청사관복 제도는 이등체강(二等遞降) 원칙에 따라 이행되었다. 중국의 품계보다 두 등급을 낮추어 대우하는 원칙이다. 이 땅의 왕에게는 중국의 황제, 황태자 다음 서열인 친왕례(親王禮: 황태자를 제외한 황족 서열에 준하는 대우)에 따라 옷이 내려왔다. 예를 들면 국가의 중요한 예식 때 입는 예복인 대례복(大禮服)에 황제는 12가지, 왕은 9가지의 무늬를 나타내었다. 대신들의 옷도 중국 3품의 옷을 이 나라의 1품이 입도록 하였다. 왕을 비롯하여 신하는 물론, 국가의 품위(品位)까지 중국보다 두 등급 아래가 되었다는 의미다.
대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도 원통한데, 옷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는 더욱 한심했다. 옷이 오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사은(謝恩)' 사절을 보냈고, 옷을 받아오지 못하면 몇 십 년이고 낡아빠진 옷을 입었다. 우리나라 왕의 신체 사이즈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옷이 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큰 옷이라도 행여 '황은(皇恩)'이 줄어들까봐 그 옷을 몸에 맞춰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입었다. 힘이 약한 국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치더라도 이는 좀 도를 넘어선 자기비하라고 하겠다.
이젠 달라졌다. 조공을 바치며 이등제강 원칙을 따르면서 읊조려야 했던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1위 미국과 2위 중국과의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의 오늘이 정치외교력만으로 이루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외교보다 앞선 경제 및 기술 발전과 한류 문화가 이루어낸 성공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K-팝,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부터 시작하여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조선 등의 산업, 패션, 화장품, 음식, 관광, 스포츠 등 한류가 전 세계에 퍼지며 이루어낸 열매인 것이다.
과거 조정에서 파벌 싸움을 일삼으며 중국에 매달리던 관리들이나 오늘날 정치권은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 나라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어나 나라를 지킨 백성들이 있었다. 삼성․현대․LG 등 기업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H.O.T․BTS․블랙핑크 등의 K-POP, 기생충․오징어게임․더 글로리 등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K-김밥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K-콘텐츠가 오늘의 우리를 일으키고 지탱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 우리 문화의 저력이 지금 이 어려운 시기의 대한민국을 지키며 지구촌을 선도해 나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