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피그스만 침공 기획은 참담한 결과를 낳아 ' 집단사고의 함정 '이란 지적 받아
정책 결정 집단 내부 구성원의 단결심 크면 클수록 '비판적 사고' 들어설 여지 줄어
1961년 1월 취임한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신선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좋은 가문 출신에, 하버드대학을 나온 지성을 갖추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도덕성과 용기를 발휘한 지도자. '뉴 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그의 비전은 미국민을 들뜨게 했다.
뿐만 아니다. 케네디의 실세 참모들 또한 젊고 영민했다. 대부분 하버드 등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최상의 영재 군단'으로 불렸으니 가히 진보를 향한 '청춘 정권'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케네디와 그의 '아이들'은 재능과 의욕은 흘러 넘쳤지만 경륜과 신중함은 모자랐다. 이들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피그스만 침공 사건'이다.
전임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부터 CIA의 주도로 기획된 이 군사작전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불과 98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이 판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케네디 정권 출범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1961년 4월 17일 미국에 망명 중이던 반카스트로 난민-미국 배후설을 불식시키기 위해 미군 대신 동원했다-을 중심으로 한 1,400여 명이 쿠바 피그스만 해안에 상륙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장비도 허술했다. 현지 사정도 예상과 달랐다. 그러니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륙 이틀 만에 100명 전사, 1,100여 명 포로라는 참담한 결과를 내고는 쿠바군에 진압되고 말았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명예와 이미지를 땅에 떨어뜨린 이 사건은 두고두고 정치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의 대상이 됐다. 그토록 똑똑한 이들이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밀어붙였는지, 왜 아무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는지 등을 다각도로 분석해 교훈을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중 미국 예일대학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사고의 함정'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정책결정 집단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 호감과 단결심이 크면 클수록 비판적 사고가 들어설 여지는 줄어들고 그 결과 집단 외부를 향해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취하게 만든다는 설명이었다. 온건파로 몰릴까 봐 침공계획에 대한 이견 제시를 주저하기도 했지만 비슷한 경력,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회의'를 하면서 '합의'를 가장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훗날 케네디를 이은 존슨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빌 모이어스는 "(정권의 핵심들이) 지나칠 정도로 밀접한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어…국사에 관한 중요한 결정들이 흡사 사교클럽 회비를 얼마나 낼지 결정하는 작은 이사회처럼 훈훈한 동료애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토로했다.
『미국사 산책 9』(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는 이 이야기를 보면, 동질성의 위험 혹은 딴소리의 가치에 주목하게 된다. 요즘 여야 지도부는 너나 할 것 없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몰아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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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