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서 은화 가장자리 깎아 은 함유량을 줄인 은화 만들고 남은 은화로 재정 충당
그레샴 법칙은 가치 있는 지식을 구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기르라는 교훈남겨
나그네가 혼자서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신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사막으로 들어서기 전에 지나온 마을에서 사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혼자 넓은 사막을 돌아다니면서 사원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는 열심히 사막을 가로질러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사막만 이어질 뿐 사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는 무더운 날씨와 갈증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나그네는 무더위와 갈증을 참고 계속 사막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나그네는 어떤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그여자는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여자가 눈을 뜨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진실입니다."
나그네는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마을 떠나 이런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진실은 슬픈 얼굴로 나그네에게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진실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몇 명 생기더니,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곳으로 내쫒았답니다. 당신이 마을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진실은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는 비로소 사막에서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진실의 여인의 말 속에는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그만한 거짓말이 점점 늘어나 진실을 몰아내고 온통 거짓말로 꾸며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거짓말로 뒤덮힌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눈을 감고 서 있는 걸로 진정성을 나타냈습니다. 나그네는 그제서야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여인의 말을 믿게 됐습니다.
이 우화는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용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악화는 '惡貨', 즉 나쁜 돈이라는 말입니다. 나쁜 돈이란 신용화폐만 통용되는 요즘에야 없는 개념이지만 옛날 여러 종류의 금속화폐가 유통되던 시절에는 나쁜 품질의 돈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테면 금화와 은화가 거래되는 경우 은화를 악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양화(良貨)는 악화와 반대 개념으로 좋은 품질의 돈, 이를 테면 금화를 가리킵니다. 구축(驅逐)은 '내몰다', '쫓아내다'라는 한자어입니다. 따라서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은 악화와 양화가 동시에 유통될 경우 악화만 거래되고 양화는 장롱 속으로 숨는다는 말입니다.
◇은화의 가장자리 깎아 만든 '악화'= 악화라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은 16세기 영국 왕실의 재정 고문관이었던 토마스 그레샴입니다. 그는 당시 국왕 엘리자베스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은화인 실링에 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좋은 돈과 나쁜 돈은 함께 유통될 수가 없다(good and bad coin cannot circulate together)"라고 썼습니다.
그레샴은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화폐의 물리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을 썼습니다. 즉 은화의 가장자리를 깎아 은 함유량이 원래보다 적은 은화를 만들어 유통시키고 남은 은화는 재정을 보충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은화의 공급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시장에는 은 함유량이 적은 은화와 은 함유량이 많은 은화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은 함유량이 적은 실링이 악화, 은 함유량이 많은 실링은 양화입니다. 양화가 된 원래의 은화는 화폐이면서 동시에 자산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양화를 녹이면 은이라는 실물 자산이 되기 때문이지요. 인플레이션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실물자산이 된 양화는 더 많은 악화로 교환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산이 된 양화를 보관하는 대신 시장에는 악화만 유통시켰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레샴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현상을 처음 지적했다기 보다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유도한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를 그레샴 법칙으로 명명하면서 경제이론으로 발전시킨 건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헨리 맥클로우드입니다. 그는 화폐로서의 가치는 똑같이 정해 놓았으나 재물로서의 실질적 가치가 다른 두 재화가 있다면 사람들은 실질적 가치가 더 높은 재화(양화)를 보관, 저축하고, 실질적 가치는 낮지만 액면가는 같은 재화(악화)를 밖에서 사용하게 될 것이므로, 시중에서 유통되는 악화(화폐로의 가치>재물로의 가치)의 양이 늘어나고 양화(재물로의 가치>화폐로의 가치)는 점차 시중에서 모습을 감춘다며 그레샴 법칙을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중에서 돌아다니는 악화가 많아져 양화의 양이 적어지니 결국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레샴 법칙은 금이나 은, 동 같은 실물 화폐가 유통되던 시절에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그레샴 법칙이 적용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인 18~19세기에는 상평통보라는 동전 화폐가 발행되고 있었는데, 구리 부족으로 화폐 주조량이 저조한 가운데 화폐가 필요한 상품 경제가 발전하는데도 조선 정부는 오히려 화폐 유통을 억제하는 이율배반적 정책을 취하자 시중에는 '돈 가뭄'이 극심해졌습니다.
요즘 말로 디플레이션이 나타난 거죠. 여기다 국민 의식을 고취시킨다면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경복궁 재건을 추진하는 바람에 추가적인 재정 수요도 생겼습니다. 이에 대원군은 부족한 화폐량을 늘리기 위해 구리 함유량이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지만 100배의 명목 가치를 부여한 '당백전'을 만들었습니다.
명목가치가 재산상의 실질가치보다 훨씬 크니 당백전은 악화인 셈입니다. 상평통보는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일치하는 양화이고요. 당백전 발행은 가뜩이나 어려웠던 조선경제에 결정타를 먹이는 악수로 작용했습니다. 상평통보를 가진 사람들은 당백전과의 교환을 기피해 상평통보를 보관하고 시중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또 상평통보를 녹여 당백전을 만드는 변조 행위도 기승을 부렸습니다. 결국 악화인 당백전만 유통되는 최악으로 상황으로 치닫게 됐고, 조선사회는 이번엔 물가가 폭등하는 초인플레에 시달렸습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 당백전 발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유통까지 금지시켰습니다.
영국과 조선의 예에서 보듯이 그레샴 법칙이 성립하려면 두 종류 이상의 화폐가 존재해야 하고 이들 중 하나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달라야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지폐나 신용카드 등 실질가치는 없고 명목가치만 있는 현대 신용화폐 체제에선 그레샴 법칙은 적용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은 무역이나 금융거래의 중심이 되는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공급을 늘려야 하는데, 이 때문에 수출보다는 수입을 많이 해야 하고 그래서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만약 무역적자를 개선하겠다며 달러화 공급을 줄이거나 중단해 버리면 달러화는 시장에서 숨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 상황은 벌어지지 않겠죠.
다만 그레샴 법칙이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주목 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 곳곳에 적용돼 사회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이솝우화처럼 말이죠.
◇가짜뉴스, 악플, 거짓정보···지식시장의 그레샴 법칙= 짝퉁과 진품을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경쟁을 시키면 짝퉁이 진품을 밀어내고 유통되다가 언젠가는 진품은 시장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도 시장 질서를 교란시켜 결국은 진품의 생명을 위태롭게 합니다. 짝퉁과 불법 복제에 대해 정부에서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집단 내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에는 성과 달성에 기여한 '양화'직원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악화'동료로 나뉩니다. 그런데 양화는 악의적 발목 잡기, 비판, 술수에 능한 악화에 밀려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조직의 운용시스템이 느슨하거나 리더십이 부족할수록 심해집니다. 유능한 신진 '양화' 정치인이 구시대적 '악화' 정치인의 중상모략으로 정치판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악화 정치인을 심판하는 것은 국민의 몫입니다.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잘못된 경제이론이 지식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개탄하며, 이것을 '지식시장의 그레샴 법칙'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듯이 거짓 지식이 옳은 지식을 몰아내고 있다고 비판했죠.
오늘날 거짓 지식과 거짓 정보, 가짜 뉴스가 온 세상을 뒤덮으며 진실의 행세를 하고 있는 세태를 일찌감치 예견한 겁니다. 거짓의 힘은 대단히 강력하다고 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정확하지 않거나 편향된 정보가 많이 유통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 인터넷 게시판의 '악플'은 멀쩡한 사람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이들 현상은 지식시장의 그레샴 법칙의 예시로 볼 수 있습니다.
지식시장의 그레샴 법칙은 우리에게 가치있는 지식을 구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동시에 가치있는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도 상기시켜 줍니다.
---------------------------------------------------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중앙일보에서 20년 넘게 금융·증권 분야를 취재, 보도하면서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재산리모델링센터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여러 매체에 금융시장, 재테크, 노후준비 등의 주제에 관해 기고도 했다. 저서로는 <이솝우화로 읽는 경제이야기>, <2012 행복설계리포트>, <거꾸로 즐기는 1% 금리(공저)>, <누구나 노후월급 500만원 벌 수 있다>가 있다.